김창열, 어떻게 물방울 그림의 대가가 됐나

노형석 기자 2024. 5. 9.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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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도 맹산 땅에서 대자연을 벗하면서 화가를 꿈꾸던 소년이 있었다.

1970~90년대 국내 화가의 그림 도상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미지가 된 탓에 서울 삼각지 이발소 그림 업체들에서 키치 작품까지 양산되었던 물방울의 조형적 의미와 그 안에 들어있는 작가의 개인사, 현상학으로까지 풀이할 수 있는 시선의 깊이까지 음미할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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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8점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서 전시
김창열 작가가 2012년 그린 말년 작 ‘물방울’(부분).

평안도 맹산 땅에서 대자연을 벗하면서 화가를 꿈꾸던 소년이 있었다. 해방 뒤 분단은 그를 고뇌에 빠뜨렸다. 중학생이던 16살 때 봇짐을 이고 38선을 넘어 월남했다. 거장 화가 이쾌대의 지도를 받고 미술대학에 갓 입학한 21살 때 한국전쟁이 터졌다. 동창생과 이웃들이 주검으로 삭아서 사라지는 것을 목도하면서 제주 섬으로 갔다. 거기서 1년 남짓 경찰관이 되어 순찰을 도는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청년 작가 김창열은 속으로 자신이 본 모든 참상을 그림으로 씻어내리고 싶다고 수도 없이 되뇌었다. 1970년대 초중반 저 유명한 물방울 그림을 내놓으며 한국 화단의 스타작가로 국민적 인기를 누리게 된 그는 말년이 되어 둘째 아들 김오안씨가 찍은 다큐멘터리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2015~2019년 제작)에서 술회했다.

‘난 많은 죽음과 끔찍한 잔인함을 봤다. 내가 처음에 물방울을 택한 이유는 어쩌면 인간의 기억을 온전히 초토화하며 모든 고통, 이 견딜 수 없는 것들을 없애기 위함이었을 것이다…내 물방울은 아기의 소변이다. 또한 스님들이 사찰마당에 부은 정화수이기도 하다.’

지금 ‘영롱함을 넘어서’라는 제목을 달고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 전관에 내걸린 작고 대가 김창열(1929~2021)의 물방울 그림 38점은 모두 이런 작가의 유년기와 청년기의 시각적 체험을 원형질로 깔고 있다. 실밥이 보이는 맨 화폭에 연기처럼 허연 궤적을 남기며 한줄기가 흘러내린 말년의 물방울과 한자나 알파벳 글자로 된 서책 위에 일정한 방향을 좇으며 맺힌 날선 물방울, 한자 자체나 거뭇한 화폭 위에 스며들거나 곤죽이 되어버린 듯한 물방울, 오롯이 직립한 듯 둥그런 모양새를 곧추세운 물방울 등이 모두 그런 기억의 고통을 머금고서 작가의 손끝에서 삐져나왔다.

갤러리현대 전시장에 나온 김창열 작가의 생전 사진. 지난 2010년 촬영했다. 갤러리현대 제공

1971년 프랑스 파리 마구간 작업실에서 재활용하려는 마대에 맺혀 청아하게 햇빛을 받은 물방울에서 착상하고 그 이듬해인 1972년 현지 전시에서 첫 선을 보였으며, 2020년 갤러리 현대의 마지막 생전 개인전 ‘더 패스(The Path)’까지 내보였던 필생의 화두 물방울들이 어떻게 변천해왔는지를 생생한 작가의 말년 다큐 동영상과 함께 훑어내리게 되는 감상의 자리다. 1970~90년대 국내 화가의 그림 도상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미지가 된 탓에 서울 삼각지 이발소 그림 업체들에서 키치 작품까지 양산되었던 물방울의 조형적 의미와 그 안에 들어있는 작가의 개인사, 현상학으로까지 풀이할 수 있는 시선의 깊이까지 음미할 것을 권한다. 6월9일까지.

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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