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 비석에 새겨진 ‘대왕’…궁예냐 왕건이냐 학계 대논쟁

노형석 기자 2024. 5. 9.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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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형석의 시사문화재
전남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 탑비를 정면에서 바라본 모습. 문화재청 제공

왕건(877~943)인가, 궁예(869~918)인가.

전라도 강진 땅에 1000년 넘게 서있는 고승 비석에 새긴 ‘大王(대왕)’의 정체를 둘러싸고 입씨름이 뜨겁다. 강진 고찰 무위사에서 9~10세기 수행했던 선각대사 형미(864~917)를 기리는 탑비 비문이 논쟁 무대다. 쟁점은 단 하나. 임금이란 뜻으로 명문에 들어간 ‘대왕(大王)’과 ‘주상(主上)’, ‘금상(今上)’의 역사적 실체가 고려 태조 왕건인지, 그에게 쫓겨난 태봉국 군주 궁예인지다. 왕건이 틀림없다는 하일식 연세대 사학과 교수와 궁예가 맞다는 최연식 동국대 사학과 교수가 지난 3월8일 열린 한국목간학회 44회 발표회(서울 동국대)에서 맞붙었다. ‘선각대사 비문에 보이는 왕건과 궁예’라는 하 교수 발표문을 놓고 한치도 양보 없는 해석의 논리 대결이 이어졌다.

선각대사는 당나라에서 10여년 유학하고 905년 귀국한 선승. 후백제 땅이던 강진 무위사에서 수행하다 인근 나주를 공략한 왕건과 가까운 사이가 됐다. 그러나 이를 시기한 궁예한테 반역죄로 몰려 처형당한 것으로 ‘고려사’ 등 사서에 전한다. 왕건의 신하였던 최언위가 생전 행적을 새긴 탑비는 정종 원년인 946년 세워져 국가보물로 지정됐다.

비석에서 ‘대왕’은 나주를 점령하는 태봉 군의 작전을 주도하고 이 과정에서 대사와 교분을 맺어 도읍에 데리고 간 주체로 나온다. 기존 사서 기록 때문에 2000년대 이전에는 명문의 ‘대왕’을 왕건으로 보았다. 하지만, 2011년 당시 최 교수는 이를 뒤엎는 학설을 내놓는다. ‘전남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란 논문을 통해 비문 재판독 결과 `대왕‘은 문맥상 궁예로 봐야 맞다고 주장한 것이다. ‘대왕’이 원정 때 형미를 만나보기를 청한 글의 높임말로 기록된 ‘단소’(丹訴), 태봉으로 데려가라는 왕명인 ‘제’(制), 형미가 태봉에 이주한 뒤 쓴 비용을 댄 곳으로 기록된 왕실 창고 ‘내고’(內庫) 등 용어들은 당시 신하 왕건이 아니라 군주 궁예에게만 쓸 수 있다는 논지였다. 912년 나주 지역에 수군을 보내 영토를 넓히고, 지역 고승 선각대사를 큰 스님으로 우대하며 태봉국에 데려간 ‘대왕’과 나중에 대사를 반역자로 몰아 고문하고 처형한 ‘주상(主上)’ 은 모두 궁예를 지칭하는 주어이자 주체가 된다는 내용이었다. 이 설은 이후 유력한 해석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반론은 10년 지나서 나왔다. 하 교수가 지난해 11월, 조계종 불교중앙박물관이 10년간 진행해온 금석문탁본조사사업 성과를 발표하는 학술대회에 참석해 최 교수 설을 정면 반박하는 사료들을 제시했다. 그는 흥선스님이 작업한 비문의 정밀탁본을 검토한 끝에 대사의 죽음을 슬퍼한 왕건이 비문을 지으라고 지시한 것으로 보이는 문구들과 최언위가 비문에서 ‘혼군’(昏君∙어리석고 정무를 판단할 줄 모르는 임금), ‘걸주’(桀紂·고대 중국 폭군의 대명사가 된 하나라의 걸왕과 은나라의 주왕) 등의 표현으로 궁예의 치세를 비판한 대목 등이 새로 확인됐다고 했다. 새로운 판독 사료들을 통해 궁예가 대사를 무도하게 도륙한 정황이 명백해졌다면서 비문의 ‘대왕’은 훗날 태조 임금이 된 왕건을 드높이려는 후대의 존칭이라는 설을 제기하고 나섰다. 지난 3월8일 발표회에서 하 교수는 이 부분에 대해 구체적인 문구를 제시하면서 왕건설을 재차 강조했으나 최 교수는 문법적 측면에서 말이 안되는 해석이라고 공박하면서 두 연구자는 불꽃 튀는 격론을 벌였다.

일제강점기 촬영한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의 모습.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해온 유리건판 사진으로 당시 기록엔 선각대사편광탑비란 유물 제목이 붙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그날 토론에서 민감한 초점이 된 비문 구절은 ‘대왕(大王) 취비봉필(驟飛鳳筆) 영부용정(令赴龍庭) 기문절적지담(冀聞絶跡之譚) 유인무언지리(猶認無言之理), 대사(大師) 낭망입내(狼忙入內) 주상(主上) 효립당헌(鴞立當軒) 난측단예(難測端倪) 실어거조(失於擧措)’란 원문으로 대사가 모함을 받아 궁예의 궁궐로 들어가는 대목이었다. 하 교수는 “대왕(왕건)이 편지(鳳筆)를 궁궐에 날려 보내며 (대사가 후백제와)자취를 끊은 이야기를 올렸으나 아무 말도 없었던 것처럼 간주되었다. 대사가 황망히 궁궐(龍庭)에 들어가니 주상(궁예)이 전각 마루에 부엉이처럼 서 있었고, 어떻게 될지 알기 어려워 어쩔 줄을 몰랐다”고 국역했다. 왕건이 대사의 사정을 변명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소용 없었고 주상, 곧 궁예가 대사를 단죄하려고 무서운 태도로 기다리고 있었다는 식으로 해석한 것인데, 왕을 지칭하는 대왕과 주상이라는 두 주어가 각각 왕건과 궁예로 다르게 나타난다. 이에 대해 하 교수는 비문을 지은 최언위가 당시 급박한 정황을 증언한 대사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시간대 순으로 이해해 정리하지 못하고 바로 직접화법 형식으로 표기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최 교수 해석은 판이하다. “대왕(궁예)이 편지를 보내 (대사를) 궁궐에 오게 해 자취를 끊은 이야기를 듣고서 말이 없는 이치를 체득하기 원한다고 했다. (이에) 대사가 황급히 궁궐에 들어가니 주상이 전각 마루에 부엉이처럼 서 있어서 (대사는) 어떻게 될지 알기 어려워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다”고 옮겼다. `대왕‘과 `주상’의 주체를 궁예로 일치시켜 풀이한 것이다.

문제의 비석 문장은 중국 전한대 생겨나 당나라를 거쳐 이땅에선 고려까지 유행한 사륙변려문(四六駢儷文)이란 특유의 고대 문장으로 시작된다. 4자와 6자를 기본으로 한 대구(對句)로 이루어진 게 특징이다. 어느 부분에서 끊어 읽을지, 한자의 뜻을 어떻게 푸느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의 갈래가 있을 수 있다. 하 교수는 비문이 나온 시점이 왕건이 사후 태조로 추존되고 궁예를 폭군으로 끌어내린 혜종~정종 시기였다는 점과 새 판독문에 궁예를 지칭해 걸주나 혼군 등의 표현이 등장한다는 점 등에서 궁예를 대왕으로 지칭하는 건 있을 수 없는 반역이 된다고 단정한다. 현대 관점으로 문법상의 문구에만 집착하면 안되며, 사료를 둘러싼 역사적 정황을 살피면서 해석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의 관점에는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와 조인성 경희대 명예교수 등 중진 학자들도 공감을 표시했다. 반면 최 교수와 동료인 윤선태 동국대 교수 등은 문법적으로 대왕과 주상 등의 주체가 궁예로 모두 일치해야 사륙변려체인 비문 문장이 일관되게 대구를 이루고 해석의 내용이 들어맞는다고 주장한다. 당대 궁예 격하 움직임이 본격화하지 않은 상황에서 대왕 표기가 온존됐을 가능성까지 인정해야 학문적으로 객관적 해석이 가능하다는 견해다. 비석과 같은 금석문 문장에서 주어 실체가 왔다갔다하는 현상은 있을 수 없다는 게 최 교수의 단언이었다.

최근 탁본 작업을 한 선각대사탑비명의 전문. 불교중앙박물관 제공

두 학설 중 하나는 틀린 것이고 배척될 수밖에 없다. 선각대사 비문의 주어 논란은 제로섬 게임으로 가는 승패의 논쟁이다. 비문 자체가 오랜 세월 풍화로 상당 부분 깨어져 내용이 불완전하고 멸실 부분이 채워질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게 한계다. 비문의 주어 해석을 놓고 두 학자와 다른 후배 학자들이 여러 다른 사료들에서 부합되는 ‘팩트’들을 찾아내면서 자기 학설의 후속 연구 성과들을 얼마나 설득력있게 뒷받침해 내놓을지가 승패의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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