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의료질서’ 위한 당면 과제[시평]

2024. 5. 9. 11:4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영용 전남대 명예교수·경제학, 前 한국경제연구원장
서로의 기대로 사회제도 형성
병원은 환자-의사 공감의 산물
낮은 酬價 규제 철폐가 급선무
의료 과실도 民事 대상 돌려야
의대 증원 반대 파업은 무리수
면허제 장벽 완화 자초할 수도

정부와 의료계가 접점을 찾지 못한 채 의료 사태가 장기화하고 있다. 정부의 의과대학 정원 확대 계획에 의사협회가 그 계획을 철회하지 않으면 대화에 일절 응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사회질서 측면에서 살펴보자.

수많은 사람이 함께 사는 사회에서 각 개인은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경험을 통해 얻은 나의 지식과 흩어져 있는 여러 사람의 지식을 이용해 남의 행동에 대한 기대를 형성한다. 그러나 불확실한 미래에 남이 취할 행동에 대한 정확한 기대의 형성은 항상 어렵다. 그래서 대개 기대 형성에 성공적이었던 사람들의 행동을 따르는데,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할 때 유·무형의 제도(institution)가 생기고, 이를 바탕으로 상호 기대가 일치하거나 일치할 확률이 높은 사물의 상태를 의미하는 사회질서가 만들어진다.

예를 들면, 가게에 가면 원하는 물건을 살 수 있다는 소비자의 기대와 고객이 물건을 사러 오리라는 가게 주인의 기대가 일치하기 때문에 상거래 질서가 생긴다. 또, 아픈 사람이 병원에 가면 의사가 치료해 주리라는 기대와 아픈 사람이 병원에 올 것이라는 의사의 기대가 일치하기 때문에 병원이라는 제도와 의료질서가 생긴다. 그런데 어느 한쪽이 이런 기대를 배반하게 되면 그 질서는 깨지고 새로운 질서가 요구된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의사들이 펼 수 있는 설득력 있는 주장은 수가(酬價) 규제 철폐와 의료 과실(過失)을 민사(民事)로 처리하라는 것이다. 수가는 의료 산업에 종사하려는 사람의 분야 선택을 안내하는 신호 기능을 한다. 이른바 필수 분야에 의사가 부족한 지금의 사정은, 그런 분야의 수가는 턱없이 낮으니 선택하지 말라는 장기간의 신호를 무시한 필연적 결과다. 가격을 규제하면 반드시 이런 결과가 초래된다. 그래서 한국의 의료제도가 부럽다는 찬사에는 의사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낮은 수가가 한몫한다. 낮은 월급 수준과 강도 높은 업무에 시달리는 인턴과 레지던트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 따라서 수가 자유화가 의료 산업 정상화의 출발점이다. 이를 바탕으로 지역 의료 문제 등의 해결도 가닥을 잡을 수 있다.

의료 과실은 형사가 아닌 민사의 대상으로 돌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당사자 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과실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높이면 과실이 없어지리라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 대표적이다. 사고가 없는 세상이 더없이 바람직하지만, 중벌로 다스린다고 해서 사고가 근절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 세상은 절대로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범죄를 사형으로 처벌한다는 아테네의 악법인 ‘먹물이 아닌 피로 쓴 드라콘(Drakon)의 성문법’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의사협회는 이런 설득력 있는 논리는 없이 증원 계획을 철회하라는 주장만 되풀이하고, 이제는 급기야 아픈 환자 곁을 떠나고 있다. 의사들의 이런 행동은 저간의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더라도 분명 유아적이다. 그래서 지금 의료질서를 파괴하는 주체는 병원을 떠나는 의사들이다.

전문 직종에 대한 면허제는 반드시 진입 장벽을 동반한다. 의료 산업은 물론 법률 서비스 산업도 마찬가지다. 지금 법학전문대학원의 입학 정원은 2000명이다. 수임료 제한이 없고 보험도 없으므로 별 말썽 없이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진입 장벽으로 말미암아 소비자가 부담하는 법률 서비스 비용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 높고 서비스 수준은 떨어질 것이다. 진입 장벽으로 경쟁이 제한되기 때문이다.

의사협회가 의료 종사자들의 수를 스스로 결정하려는 방침을 고수한다면 의료질서는 수정될 수밖에 없다. 수가 규제를 철폐하고 건강보험은 그에 따라 조정하되, 면허증이 없으면 의료 산업에 종사하지 못하는 현행 면허제를 폐지하고, 이러저러한 의술 훈련을 받았음을 증명하여 소비자에게 공개하는 인증제로 바꾸어서 진입 장벽을 크게 완화하는 것이다. 의료 산업 내 경쟁을 강화해 서비스의 품질 수준도 높일 수 있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질서 아래 있는 의사가 지금보다 많아지든 적어지든, 그 수가 적정이다. 적정 의사 수는, 법원은 물론 아무도 사전(事前)에 알 수 없으며 시장에서 끊임없이 조정되는 것이다.

김영용 전남대 명예교수·경제학, 前 한국경제연구원장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