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하는 아빠 과학자]② "육아휴직 1년이 복귀 후 연구의 동력"

이채린 기자 2024. 5. 9.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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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영 한국핵융합에너지연 연구원 "사회에 도움 주는 게 과학…저출산 시대 육아도 의미있어"
한국핵융합에너지연구원에서 만난 허준영 선임연구원. 이채린 기자

<편집자 주> 육아휴직을 쓰는 아빠가 늘고 있다고 합니다. 과학기술계에서도 느는 추세지만 현장 경험과 연구 지속성이 과학자에게 중요한 만큼 자녀를 위해 연구를 멈추는 건 쉽지 않습니다. 연구의 꽃을 피워야 하는 시기인 30, 40대 아빠 과학자에게 육아휴직은 어려운 결정입니다. 하지만 과학기술계도 예외여서는 안됩니다. 장기적으로 일과 가정이 양립해야 인재가 지속적으로 유입되기 때문입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동아사이언스는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WISET)과 함께 육아휴직, 단축근무 등 육아지원 제도를 활용하는 과학자들을 직접 만났습니다. 남성 과학자가 겪는 현실 육아, 필요한 육아지원 제도, 아빠가 되면서 달라진 삶과 일에 대한 태도 등을 릴레이 인터뷰를 통해 생생히 들여다 봅니다. 과학자를 꿈꾸는 이들에게 '육아'가 걸림돌이 되지 않는 합리적, 현실적인 방안을 함께 고민해 보기를 기대합니다. 

"이제 내가 해 볼게."

핵융합을 연구하는 허준영 한국핵융합에너지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고 2022년 한해 동안 육아휴직에 들어갔다. 아내도 생산기술을 연구하는 과학자다. 가정을 위해 경력을 희생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고생한 아내에 이어 이제 자신이 나서야 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팀 내에 남성 육아휴직자는 아무도 없었지만 남들이 걷지 않은 길을 한번 걸어보고 싶었다. 4월 23일 대전 한국핵융합에너지연구원에서 허 연구원을 만나 육아휴직을 선택했던 이유를 들어봤다.  

핵융합은 인류가 '궁극의 미래 에너지'로 기대하는 기술이다. 허 연구원은 학창시절부터 꿈꿨던 공학자가 될 수 있고 인류의 미래를 위해 일을 한다는 자부심을 얻을 수 있는 한국핵융합에너지연구원을 2017년 직장으로 선택했다.

문제는 자신보다 2년 먼저 취업한 아내의 직장이 대전과 멀리 떨어진 인천 송도에 있다는 점이었다. 아내가 양보를 했다. 아내가 충남 천안 지사로 옮기고 함께 천안에서 살기로 했다. 허 연구원은 천안과 대전을 1시간 오가며 출퇴근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박사 학위를 어렵게 딴 뒤 얻은 직장을 떠나 지사에서 새로운 일에 적응해야 했던 아내에게 미안함이 컸다.

허 연구원은 "아내는 2021년 2월 아들을 낳고 3개월 출산휴가에 들어갔지만 맡고 있던 프로젝트의 책임자라 집에서 모유수유를 하다가, 기저귀를 갈다가도 화상회의를 했다"고 말했다.

허 연구원은 2022년 1월 마침 자신이 참여한 연구 프로젝트가 끝나면서 '육아휴직'을 쓰기로 결심했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지속되며 자녀를 마음 놓고 맡길 곳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주변에 부탁할 가족이 없어 부부끼리 육아를 해내야 했다.

팀 내에 육아휴직을 신청한 남성은 없었지만 "언제든 육아휴직을 써도 된다"라고 이야기 해준 팀장한테 힘을 얻었다. 프랑스에서 10년 동안 근무를 하며 '가정 우선주의' 문화가 익숙한 상사였다. "대부분 과학자들은 육아휴직을 써야할 때 승진이 걸려 있거나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있는 경우가 많다. 또 대부분 안 쓰기 때문에 쓸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한다"라고 허 연구원은 말했다.     

육아휴직이 가능했던 건 허 연구원이 참여하는 프로젝트가 대부분 장기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와 협력하는 프로젝트라 시작부터 끝까지 10~15년씩 걸린다. 잠깐 연구를 멈춘다고 해도 큰 타격이 있지 않다.

"제가 운이 좋은 거예요. 호흡이 긴 프로젝트에 속했고 마침 프로젝트가 끝나는 시기라 팀원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됐으며 육아에 대한 이해가 높은 상사가 있었습니다. 이 3가지 조건이 가능했기 때문에 육아휴직을 쓸 수 있었어요. 역설적으로 이중 하나라도 이뤄지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았을 거예요." 

허 연구원은 육아휴직을 쓸 때 "일과 관련된 고민은 크게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30년 넘게 일할 예정인데 1년 멈춰도 나중에 따라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면서 "사회에 도움되는 연구를 하는 것이 보통 과학자들의 꿈인데 출산율이 1명도 안 되는 시대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이 좋은 연구만큼 사회에서 의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허 연구원에게 육아는 만만치 않았다. 일단 자신과 함께 보내는 1년이 돌쟁이인 자녀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칠까 두려웠다. 하루종일 자녀와 12개월 동안 무얼 하며 보낼지 생각하니 막막하기도 했다. 첫 한두달은 자녀와 단 둘이 있는 생활에 적응하는 데 집중했다.

때론 자신이 사회적으로 고립된 섬처럼 느껴졌다. 허 연구원은 "문화센터나 키즈카페에 가도 보호자가 엄마가 대부분이라 처음엔 그들과 어떤 말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고 했다.  

좌충우돌을 겪었지만 차츰 자녀와 허 연구원 모두 서로에게 완벽히 적응해갔다. 아침에 일어나 산책하고 집안일을 하면서 자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장난감을 갖고 노는 일상이 익숙해졌다. 매일 엄마와만 함께 자려고 하던 아들이 육아휴직 후엔 아빠를 엄마 만큼 찾았다.

자녀와 단둘이 있을 때 발생하는 어떤 돌발상황도 두렵지 않게 됐다. 그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추억이 생겼다"며 "사람 없는 오전에 아이와 마트에서 물건을 사고 카페에서 여유롭게 맛있는 과자를 먹었던 시간이 가장 기억이 남는데 지금도 일하면서 그때를 회상하며 힘을 낸다"고 말했다.

허 연구원의 가족. 허준영 제공

허 연구원은 "1년 동안 자녀와 있으면서 아내가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면서 "최근 아내가 여러 상을 수상하는 등 결실을 맺는 모습을 보며 뿌듯하다"고 말했다. 그도 휴직 기간 동안 일 생각을 아예 내려놓지는 않았다. 자녀를 재우고 난 뒤 휴대전화, 컴퓨터로 일에 관한 기사를 찾아보고 지속적으로 동료들과 일 이야기를 하며 일에 대한 감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복직 전날, 일을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에 설레서 잠을 못잤어요. 심장이 뛰더라고요. 노래 '벌써 1년'을 들으며 감성에 젖은 채 출근을 했어요(웃음). 돌아갔더니 자연스레 일을 하게 되더라고요. 다시 입사하는 느낌으로 일에 몰입했어요. 자녀가 있으니 야근도 쉽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최대한 제한된 시간에서 일을 효율적으로 하려고 노력해요."

복직 후에도 허 연구원은 새벽 6시에 출근해 오후 3시에 퇴근하는 '선택적 시간근로제'를 이용해 일과 육아 모두 전념하고 있다. 집에서 직장까지 1시간이 걸려 오전 4시 30분에 기상한다. 5시에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6시에 직장에 도착하고 그 시간 아내는 자녀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킨다. 오후 3시에 퇴근해 바로 자녀를 하원하고 저녁을 먹이고 있으면 아내가 퇴근해서 집에 온다. 회의는 대부분 오전에 잡지만 외국 기관과 함께하는 화상 회의가 오후 3시 이후에 잡히면 허겁지겁 집에 와서 참여한다. 

이같은 생활이 가능한 건 직장 동료들 덕도 있다. "회사 분위기가 점점 가족적으로 넘어가고 있어요. 밤늦게 회의나 저녁 약속은 거의 없고 육아로 인해 직장에 양해를 구해야 할 때 서로 잘 이해하는 분위기가 되고 있어요. 자녀가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 것 같아요. 제가 이해를 한 번 받으면 또 다른 팀원이 비슷한 상황일 때 이해하면서 긍정적인 효과가 납니다." 직장에 대한 그의 고마움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 연구원은 "가족 도움 없이 부부끼리 육아를 해야하는 상황에서 둘 이상 낳는 것은 무리"라고 말했다. 자녀가 아프면 허 연구원 부부의 루틴이 깨진다. 7일 이상 병간호를 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누군가 휴가를 써야 하고 그동안 일이 쌓인다. 자녀가 둘 이상이면 이같은 상황이 더 자주 발생하기 때문에 일과 가정의 균형을 맞추기 어렵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허 연구원은 남성을 비롯해 육아 지원 제도를 쓰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이같은 모습이 '주류문화'가 돼야 일과 가정 양립이 어려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세상에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회사에서 직원이 육아를 위해 잠시 쉬는 걸 회사에 큰 손해라고 생각하지 않길 바란다"며 "과학자들이 많이 일하는 정부 출연연구기관도 한국이 잘 되길 바라는 기관으로 길게 보면 아이들이 잘 자라는 것이 국가를 위한 일이다"라고 덧붙였다.  

허 연구원은 자녀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냐는 질문에 "엄마, 아빠는 어쩔 수 없이 너 1명 키우는 것으로 육아가 끝나겠지만 네가 훗날 마음껏 자녀를 낳을 수 있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면서 "네가 나에게 준 기쁨을 훗날 네가 꼭 느끼길 바라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자녀를 키우는 건 쉽지 않아요. 하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매일매일 자녀 덕분에 새로운 경험을 하고 새로운 기쁨을 깨닫습니다. 제 아들이 이런 행복을 꼭 느끼길 바랍니다."

다음은 일문일답. 

Q. 현재 하는 일은.

"한국핵융합에너지연구원은 핵융합 발전 기술을 개발하고 상용화하는 연구를 하는 기관이다. 이곳에서 프랑스, 한국, 인도 등 7개 나라가 개발하는 국제핵융합실험로(ITER) 한국사업단에서 일하고 있다. 나라별로 미션이 다르다. 핵융합실험로에 쓰이는 '삼중수소'를 안전하게 저장하고 보관하는 방법을 연구한다."

Q. 육아휴직을 고민하는 아빠 과학자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인생은 길고 1년 정도 멈춰도 괜찮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육아휴직을 하거나 육아에 많은 시간을 쓰면 속도는 줄겠지만 방향을 잡는 데 해가 되지 않는다. 절대 인생의 마이너스(-)가 되지 않고 오히려 삶과 일에 많은 의미를 찾을 수 있으니 도전해 보라."

Q. 그들에게 하고 싶은 현실적인 조언은.

"육아휴직 전 연차를 써서 자녀랑 하루종일 단 둘이 있는 연습을 해보길 바란다. 익숙하지 않은 아빠들이 생각보다 많다. 또 아내가 가장 힘든 시기인 신생아 때 육아휴직을 하면 부부와 자녀에게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Q. 직장에서 앞으로 목표가 있다면.

"일적으로는 어디까지 올라가겠다는 목표는 특별히 없다. 다만 오늘 인터뷰 주제에 맞춰 생각해본다면 나중에 내가 나이가 들어서 후배가 육아휴직을 낸다고 했을 때 마음껏 이해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채린 기자 rini11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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