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한국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착각
● 한반도 이슈가 美 선거 어젠다?
● 지정학 격동기 韓 외교 자충수
● 日은 동북아 넘어 대전략 마련
● 美는 ‘선택과 집중’ 시대 맞아
● 유럽 국가 재무장 지원 고려해야
2018년 6월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한국 언론과 정치권 일각에서 횡행하던 주장이다. 그러나 미국 국내 정치에서 외교는 늘 작은 비중을 차지했다. 그중 한반도 문제의 비중은 더욱 작은 것이 현실이다. 2018년에는 많은 이들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개인플레이로 협상의 실마리가 풀릴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미국 외교정책은 한 사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또한, 트럼프가 김정은과의 '브로맨스'로 국내 정치적 이익을 기대했다고 해도 효과는 다른 국내 어젠다에 비해 미미했을 것이 자명하다.
‘한반도 이슈가 미국 선거의 핵심 어젠다'라는 생각은 한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전제를 기반으로 한다. '한반도 천동설'이다. 최근까지도 이런 생각을 바탕에 둔 위험한 주장들이 나왔다. 한국이 미·중 간 줄타기 외교를 통해 양쪽에서 실리를 챙길 수 있다는 견해가 대표적이다. 한국이 미·중 경쟁을 제어할 수 있고, 미·중은 한국의 줄타기 외교를 용인할 것이라는 주장도 보인다. 국제 정세에 기반한 주장이라기보다는 믿음의 영역에 가깝다.
한반도 천동설은 남북관계 중심의 외교정책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역대 한국 정부는 대북정책을 다른 모든 외교 이슈보다 우선시했다. 어느 정도 당연한 현상이다. 1990년대 이후 한반도 주변 정세와 국제 정세는 급변했다. 미·중 관계도, 일본의 역내 입지도, 러시아와 서방의 관계도 구조적으로 변화했다. 그러나 북한만큼은 늘 우리에게 안보 '상수'로 남아 왔다. 정부마다 접근법은 달라도 대북정책이 우리 외교의 핵심이었던 이유다. 보수 정권은 힘을 통한 평화를, 진보 정권은 대화를 통한 협력을 추진했다. 남북이 분단돼 있는 한, 방향은 달라도 북한은 언제나 압박과 관여가 필요한 대상이다.
문제는, 민족주의에 갇혀 세계를 넓게 보지 못하게 됐다는 점이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2017년은 미·중 경쟁이 격화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러나 그 이후 5년간 한국 외교는 남북협력과 대북제재 해제에 초점을 뒀다. 격동하는 지정학의 시대에 스스로를 좁은 시야 속에 가둔 자충수였다.
2018년 문재인 당시 대통령의 유럽 순방은 국내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으나, 향후 펼쳐질 외교 실패의 초기 증세를 보였다. 당시 한반도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관심사는 핵 비확산에 맞춰졌다. 대북제재 조기 해제를 통한 유화책이 역사적으로 실패한 것은 차치하고, 북한 핵무기 및 핵물질이 반출돼 테러리스트나 타 적성국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는 일이 최우선이었다. 핵 비확산조약(NPT)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여기는 국가들에 남북 경제협력의 중요성과 경제교류를 통한 북한의 점진적 개혁이라는 공상적 믿음을 설파하려 한 것이다.
‘전략'이 부재한 한국 외교
2021년 문재인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 대통령 간 정상회담은 공동성명에서 사상 처음으로 '대만해협'의 안정을 언급하며 화제가 됐다. 그러나 그에 상응하는 정책은 나오지 않아 '말뿐인 선언'이 됐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당시 정부는 2022년 5월 문 대통령 임기 종료 전까지 종전 선언을 이루기 위해 모든 외교 이슈를 후순위로 미뤘다. 중국의 협조로 종전 선언을 이끌어내기 위해 쿼드(Quad·미국·일본·호주·인도의 안보 협의체)와의 협력 등 중국에 눈엣가시가 될 만한 행동은 자제했다. 대만과 남중국해에 대한 언급이 공동성명 내 "2018년 판문점 회담과 싱가포르 선언을 재확인한다"는 문구를 위한 반대급부에 불과했다는 지적이 나왔다.‘한반도 천동설'에서 탈피하려는 시도가 없던 것은 아니다. 문재인 정부 또한 신남방정책을 통해 한국 외교의 지평을 넓히려 했다. 신남방정책은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경제협력을 꾀했다. 윤석열 정부는 2022년 집권 첫해부터 유럽 국가들과 경제, 안보 협력을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에 참여했다. 한국은 우크라이나에 포탄을 우회 지원하며 나토의 병참을 간접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대북정책, 4강 외교와 남방정책, 유럽정책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하나의 '전략'이 부재하다. 한국은 체급에 비해 각 지역을 엄격히 구분해 보는 경향이 있다. 중동의 이슈는 중동의 일이고, 유럽의 전쟁은 유럽의 안보 위기일 뿐이라는 시각이 강하다. 2020년 호르무즈 해협에서 위기가 고조됐을 때, 정치권의 많은 이들은 우리가 최대한 물러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유럽의 안보가 우리와 무관하니 남·북·러 가스관 건설을 계속 추진해야 한다고 했다. 대만 위기가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는 주장도 스스럼없이 나온다.
그러나 각 지역의 정세와 안보는 촘촘히 연결돼 있다. 2021년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이 재집권하자 아프가니스탄이 또다시 테러단체의 은신처가 돼 서방국가를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실제로 탈레반 정권은 숙적인 ISIS-K 토벌에 고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국제유가, 곡물 가격에 큰 충격을 줬다. 중국은 미국의 자원을 유럽에 묶어두기 위해 파트너인 러시아를 지원하고 있다. 가자 전쟁은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 간의 관계 정상화를 늦추고 홍해 물류에 타격을 줬다. 10대 경제 강국인 한국과 무관할 수 없는 사건이다.
특히 대만을 둘러싸고 고조되는 긴장은 한국에 직접 영향을 준다. 국내 물동량의 40% 이상이 대만해협을 통과한다. 블룸버그통신은 대만에 전쟁이 터지면 한국 국내총생산(GDP)이 23%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다. 지난해에는 미국이 대만 유사시 주한미군 여단급 부대의 파병을 우리 정부에 제안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단순히 관련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한국의 사활이 걸린 문제라 해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다수의 정계 인사는 이 문제를 외면한다. 왜 한반도 밖의 일에 굳이 관여해서 중국과의 관계를 손상시키느냐는 논리다.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로 나타난 일
강대국들은 지역 전략을 연계한 대전략을 갖고 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가자지구 등 동시다발적 국제 안보 위기에 대응해 각 지역 동맹국의 역할을 강조한다. 일본은 동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인프라 투자를 일본판 '인도-태평양 전략'의 한 축으로 삼았다. 동북아시아에만 집중하는 대신, 각 지역 간의 연계 포인트에 착안해 하나의 대전략을 마련한 것이다. 프랑스는 전통적 영향권인 서아프리카에서 러시아의 입김을 견제하며 동시에 우크라이나에 지상군 파견까지 거론하고 있다. 한국이 아직 범지역적 대전략을 마련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면, 최소한 전술을 넘어선 '전략'만큼은 구축해야 한다.국제정치학자 이안 헨리(Iain Henry)는 국가가 동맹국이 다른 동맹국을 어떻게 대하는지 유심히 관찰한다고 주장했다. 요컨대, 미국의 유럽 동맹국들은 미국이 아시아 동맹국에 대한 안보 공약을 어떻게 준수하는지 살펴본다. 이때, 유럽 국가들은 단순히 미국의 충성도만을 체크하지 않는다. 미국이 위기에 빠진 아시아 동맹국에 얼마나 '충성스러운지(loyal)'와는 별개로,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 반영되는 미국의 이해관계(interests)와 능력(capability)이 유럽 국가들에 유리한 방향인지 확인한다. 즉 필요시에는 아시아 동맹들을 손절해 자신들을 도울 여력을 확보하길 희망한다. 실제로 6·25전쟁 당시 미국의 유럽 동맹국들은 전쟁이 장기화하자 성급하게라도 휴전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이 전쟁에 깊이 개입한 상황에서 유럽에서 소련의 위협을 우려한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일본, 호주를 비롯한 미국의 아시아 동맹들은 미국의 전력 분산을 걱정한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이기길 바라지만, 전쟁이 계속되면서 '밑 빠진 독'이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한다. 유럽이 우크라이나 지원에 더 큰 역할을 하고 미국은 아시아에 집중하기를 바라는 목소리도 있다. 호주 언론에서는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것은 호주와 미국 모두에 가장 중요한 동아시아에서 중국을 억제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나온다.
일본에서도 우크라이나를 어느 선까지 지원해야 하는지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일본은 패트리어트 대공 미사일을 우크라이나에 (미국을 통해) 우회수출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과 미국 일각에서는 이에 반대하는 기류도 읽힌다. 패트리어트 대공 미사일로 주일 미군기지를 보호하고 대만에 보내야 하는데 엉뚱한 곳에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쟁 초반 '아시아 안보와 유럽 안보의 불가분성'을 역설하며 우크라이나 지원을 역설하던 일본이지만 전황의 흐름에 맞춰 여러 변수를 종합적으로 고려하고 있다.
미국 공화당의 외교안보 전략가들은 유럽의 안보는 나토 동맹국들에 맡겨두고 미국은 중국에 집중하자고 주장한다. '아시아 우선주의(Asia First)'다. 미국 처지에서 여러 전장에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인데, 아시아가 유럽보다 경제적으로 더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유럽 동맹국들의 국력을 합하면 러시아를 능가하지만 아시아에서는 중국의 힘이 압도적이기 때문에 미국은 아시아에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특히 우크라이나에 대한 과도한 지원이 대만 방위 태세를 약화시킨다는 지적이 대두하고 있다. 과거 미국은 두 개의 큰 전쟁을 동시에 수행할 능력을 갖췄었다. 그러나 '두 개의 전쟁 독트린'은 오바마와 트럼프 행정부를 거치며 공식적으로 폐기됐다. 미국의 방위산업 기반이 약해졌고, 중국·러시아 등 라이벌은 강해졌다. '선택과 집중'의 시대가 온 셈이다. 2024년 11월 대선에서 트럼프가 승리한다면 '아시아 우선주의'는 가속화할 가능성이 있다.
막연한 슬로건
호주, 일본, 미국에서의 논의는 해당 국가가 합리적이고(rational) 능력 있을(capable) 때 진행된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지 않으며, 수많은 변수의 상호작용이 일어난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가능하다. 그러나 국내 정치권은 하나의 성숙한, 합리적 개체로서 작동하고 있지 않다. 외교와 관련된 토의에서조차 막연하게 "괜히 러시아를 자극하지 말자" "우크라이나 전쟁은 미국 때문이다" 등의 슬로건이 보인다. 대만과 관련한 논의는 찾아보기 어렵다. '중국과 대만 모두에 잘 보이면 되지 않느냐' '대만 이슈에 개입하지 않으면 영향 받을 일도 없다'와 같은 안일한 한반도 천동설이 유행한다.한국에 가장 시급한 과제는 미·중 경쟁의 흐름과 양상을 파악하는 것이다. 특히 대만과 남중국해에서 미·중 간 군사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을 주시해야 한다. 일본, 호주, 필리핀 등 역내 미국의 동맹국은 이 위험을 간과하지 않는다. 일본은 미국과의 안보 동맹을 업그레이드할 것으로 보인다. 미군 태평양함대에 연결된 미군 합동 태스크포스를 창설해 대일본 지원 구조를 강화하는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고 한다. 대만 유사시를 대비해 양국 간 조율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한국도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유사한 처지에 있는 국가들과 긴밀히 움직여야 한다.
유럽의 안보 현황도 주시해야 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의 재무장 과정에서 한국 방산업체들이 게임체인저 역할을 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국은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미국·일본과 달리 대만에 직접적 군사 지원을 하기 어렵다. 대만에 보낼 수 있는 자원이 아니라면, 한국의 안보를 저해하지 않는 선에서 유럽 국가들의 재무장을 돕는 방안도 생각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미국이 아시아에 집중할 공간을 열어줄 수 있다.
극심하게 분열된 사회에서 국론 통일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러나 최소한 유의미한 어젠다에 대해 진지하게 토의해야 한다. 세계는 한국을 중심으로 돌지 않기 때문이다.
홍태화 미국 외교정책연구소(FPRI) 유라시아 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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