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법조인이 정치도 잘할까?

나경희 기자 2024. 5. 8. 06:4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제22대 총선 결과 당선자 300명 중 61명이 법조계 출신이었다. 전체 인구에서는 0.07%에 불과하지만, 국회에서는 20.3%에 달하는 비율이다. 역대 최다 기록이다.
제21대 국회가 개원한 2020년 7월16일 국회의원들이 의원 선서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한민국 판사·검사·변호사 수를 모두 합치면 대략 4만명이다. 전체 인구 5100만여 명 중 약 0.07%다. 하지만 오는 5월30일부터 임기가 시작될 제22대 국회에서 법조계 출신 의원은 전체 300명 중 61명, 무려 20.3%에 달한다. 1만명 중 7명뿐인 ‘귀한’ 법조인이, 나라 전체의 민심을 골고루 대변해야 하는 집단에서는 5명 중 1명꼴로 흔해졌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선 시점을 기준으로, 당시 제14대 국회 재적의원 299명 중 25명이 법조계 출신이었다. 비율로 따지면 8.4%인데, 이때 이후로 10%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다. 지난 30여 년 동안 법조계 출신 국회의원은 꾸준히 40~50명대, 15% 내외를 유지했다(〈그림 1〉 참조).

차기 국회 구성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그림 2〉 참조). 분야를 세분화하면 전체 법조계 출신 당선자 중 변호사가 31명, 검사 19명, 판사 9명, 법무관 1명, 정부 관료(사법시험에 합격했으나 공무원으로 일함) 1명으로 분포해 있다. 검사 출신 당선자 19명 중에서는 민주당이 8명, 국민의힘(8명)과 국민의미래(1명)를 합쳐 9명, 조국혁신당이 1명이다. ‘검찰 규제’를 외치는 쪽에서도 검사를 적지 않게 기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법조계 출신 민주당 당선자 37명 중 14명(37.8%)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다. 조국혁신당 법조인 당선자 3명 중 2명도 민변 출신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번 법조계 출신 당선자 61명 중에 16명이 민변 출신이다. 민주당 서울 강북을로 공천받았다가 사퇴한 조수진 변호사, 부동산 갭투기 의혹으로 세종갑 공천이 취소된 이영선 변호사 등 민변 출신이 공천 과정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민변에서 활동하는 한 변호사는 “민주주의가 자리 잡는 과정에서 1988년 출범한 민변이 큰 역할을 했다. 그 역할을 하다 보니까, 혹은 그 역할을 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몇몇이 정계에 진출하기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런 케이스다. 그런데 300명 중 16명(5.3%)은 그렇게 우연한 결과로 볼 만한 수치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민변의 설립 취지는 자본이나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약자들의 안식처가 되자는 것인데, ‘출세의 등용문’처럼 비춰지면 처음부터 민변 활동보다 정치를 염두에 둔 사람들이 모이게 될 거다.”

수도권 지역에서 당선된 민변 출신 한 예비 국회의원은 자신도 그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며 권력 감시에 더욱 충실하겠다고 말했다. “다만 민변 회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정계 진출을 금지할 수는 없기 때문에, 정계 진출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경각심을 가지고 계속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법조계 출신 국회의원 당선자가 점점 늘고 있는 한국의 추세는 다른 주요 국가의 흐름과도 동떨어져 있다. 이번 총선이 치러지기 전 국회입법조사처에서 발행한 연구 보고서 〈국회와 주요국 의원의 직업적 배경 비교: 법조계 출신 의원을 중심으로〉에 따르면, “미국(30.0%)과 영국(7.2%)의 경우 과거에 비해 법조계 출신 의원 비율이 감소하는 추세인 반면, 공무원이나 선출직 공직자 출신이 증가하고 있는데, 이는 ‘정치의 영역’이 전문적인 영역으로 인정받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해석할 수 있다.” 유달리 법조계 출신 비율이 높은 미국의 경우 상당수가 로스쿨(대학원)에 가기 전 학부에서 정치학을 전공한다. 애초에 정치 입문을 목표로 하는 셈이다. 이마저 수치가 점점 줄고 있다.

이와 달리 한국 국회에 법조계 출신 의원이 많아지는 이유는 뭘까. 후보자 입장에서는 정계 진출의 기회비용이 다른 직업에 비해 크지 않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다. 설사 국회 진입에 실패하더라도 얼마든지 다시 법조계로 돌아가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로스쿨 이후 법조인 공급이 늘어난 것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법률 엘리트에 의한 정치 장악”

정당이 법조인을 영입하는 이유 중 흔히 떠올리는 것은 ‘국회는 입법기관이므로 법에 전문성이 있는 인사를 데려와야 한다’는 점이다. 비록 의정 활동을 계량화해 평가하긴 쉽지 않지만, 법조인이 비법조인에 비해 두드러진 활약을 보여준다는 뚜렷한 증거는 찾기 어렵다. 이번 총선 이전까지 법조계 출신 의원 비율(19.7%)이 가장 높았던 제18대 국회(2008~2012년)의 법안 발의 건수와 가결률을 분석한 논문 〈국회의원의 법조인 경력은 입법 활동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가?〉(조진만 외, 2016)에 따르면, “국회의원의 법조인 경력은 월평균 법안 발의 건수에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결률도 마찬가지였다.

법조계 출신 의원이 14.0%였던 제19대 국회(2012~2016년)를 분석한 논문 〈법조인 출신 국회의원의 입법 활동은 차이를 보이는가?〉(전진영 외, 2021)는 여기서 한발 더 들어간다. 발의안 중에서도 사법시험 과목인 헌법·민법·형법 등과 관련된 법률안만 따로 모아 분석한 것이다. 그 결과 법조계 출신 의원이 발의한 사법시험 과목 관련 법안의 가결률은 7.1%로, 비법조계 출신의 가결률 2.9%보다 높았다. 하지만 역시 전체 발의 건수나 가결률은 법조계 출신이라는 점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오히려 해당 논문은 “법조인 경력보다는 지방의원 경력이 입법 성공에서 더 중요한 것으로 검증”됐다고 결론 내린다.

박상훈 박사(정치학)는 “한국에만 법조계 출신 의원들이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법조계에 있다가 곧바로 국회로 직행하지는 않는다. 국회의원이 첫 정치 경력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정치도 전문 영역이기 때문에 정당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차곡차곡 경험을 쌓아야 국회에 들어갔을 때 정치를 잘할 수 있는데, 그만두자마자 선거판으로 달려가는 상황은 법률 엘리트에 의한 정치 장악이라고 해석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라고 말했다.

한 야당 관계자는 결국 ‘입법 전문성’보다 ‘힘의 논리’로 결정되는 인재 영입과 공천 시스템이 문제라고 말했다. “‘대장동 변호사’라 불리는 다섯 명(김기표·김동아·박균택·양부남·이건태)이 모두 당선됐다. 우리 당이지만 부끄러운 일이다. 여당도 박근혜 전 대통령을 변호했던 유영하 변호사와 불과 얼마 전까지 대통령비서실 법률비서관이었던 주진우 전 검사에게 공천을 주지 않았나. ‘이렇게까지 해도 되는구나’를 서로 학습하면서 점점 지켜야 할 선이 희미해지고 있다.”

정치 경험 없이 여의도로 직행

앞서 제18대 국회에서 법조계 출신 의원들의 발의 건수와 가결률을 분석한 논문을 썼던 조진만 덕성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정치인과 법조인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법은 방어적인 기제다. 테두리를 벗어나는 걸 허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치에서는 법이 불편하면 법을 바꾸면 된다. 선출된 권력인 입법부는 법을 바꾸거나 만드는 곳이고, 사법부는 (누군가를 처벌하는 등의 방식으로) 그렇게 정해진 법을 실행하는 곳이다. 타협할 수 없는 법 영역에 익숙한 법조인들이 정치 영역에서도 잘할 거라는 보장은 없다.”

그중에서도 경험이나 숙련 과정 없이 여의도로 직행한 법조 출신 정치인들은 정치를 법정에서처럼 ‘이기고 지는’ 문제로 생각해 타협과 조정을 꺼리기도 한다. 검찰총장을 그만두자마자 대선에 출마해 당선된 윤석열 대통령이 단적인 예다. 윤 대통령은 취임 2년이 다 되어가는 4월25일 현재까지 단 한 번도 제1야당 대표와 국가 현안을 논의한 적이 없다. 지난 4·10 총선에서 여당이 참패한 후에야 ‘만남을 논의하자’는 전화를 걸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피고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누구든지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야 할 의무가 있는 대통령이라기보다 책임 추궁과 처벌에 익숙한 검사 출신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검사 독재 타도’를 외치는 제1야당 대표 역시 변호사 출신이고,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도 검사 출신이다. 이런 ‘정치의 부재’에 지쳐 적지 않은 유권자들이 정권 심판론을 택했지만, 모순적이게도 그 결과 ‘역대 최다 법조계 출신 국회의원’이 탄생하는 기록을 쓰게 됐다.

나경희 기자 didi@sisain.co.kr

▶읽기근육을 키우는 가장 좋은 습관 [시사IN 구독]
▶좋은 뉴스는 독자가 만듭니다 [시사IN 후원]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