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농업외교]① 수혜국에서 공여국으로…사람을 살리는 ‘쌀’ 10만톤 출항 시작

군산=윤희훈 기자 2024. 5. 8.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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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올해부터 국제사회 쌀 원조량 5만 → 10만t 로 늘려
11개국 260만명에 영양 지원
쌀 10만t 지원에 3400억 소요
기여 확대도 중요하지만 ‘지속가능성’이 우선
지난 4월 17일 전북 군산항에서 트럭에 실린 쌀을 배로 옮기는 선적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윤희훈 기자

전북 군산항엔 일제시대 수탈의 아픔이 서려있다. 일제는 1899년 개항한 군산항을 한반도 최대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의 곡물을 수탈하기 위한 항구로 활용했다. 이 곳에 모인 미곡은 큰 배에 실려 도쿄와 오사카, 고베 등으로 향했다.

한국 전쟁 이후 피폐해진 땅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나라는 세계 각국의 원조를 받았다. 세계식량계획(WFP)의 식량 원조도 있었다. 20여년 간 WFP의 식량원조를 받았던 한국은 이후 대규모 산업개발, 이른바 ‘한강의 기적’을 통해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국제사회의 도움을 받던 나라는 이제 도움을 주는 나라로 바뀌었다. 원조를 받던 나라가 공여국으로 바뀐 것은 세계에서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지난달 17일 군산항에서선 포대에 태극기가 새겨진 국내산 쌀 1만5000톤(t)이 배에 실리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한 세기 전 수탈의 현장은 이제, 세계 식량 원조 항만으로 탈바꿈했다.

◇ 방글라데시와 아프리카로 향하는 K-쌀… 260만명 살린다

군산항에서 실린 쌀 1만5000t은 방글라데시로 향한다. 지난 3일 군산항을 떠난 베트남 국적 벌크선 ‘민쟝호’는 10여일간의 항해 후 오는 15일 방글라데시 ‘치타공항’(Port of Chittagong) 에 도착할 예정이다.

방글라데시에 전달된 쌀은 미얀마에서 방글라데시로 넘어간 로힝야 난민의 식량 지원에 쓰인다. 현재 방글라데시의 미얀마 접경지역에는 집단 학살을 피해 들어온 로힝야족 120만명 가량이 체류 중이다.

베트남 국적 벌크선 '민쟝호'에 실린 쌀. 민쟝호는 쌀 1만5000t을 싣고 방글라데시로 출항한다. /윤희훈 기자

정부는 올해 방글라데시 외에도 아프리카의 기니비사우(2400t)·마다가스카르(1만t)·모리타니(6720t)·모잠비크(3000t)·시에라리온(2400t)·우간다(3000t)·에티오피아(13600t)·케냐(2만1000t), 그리고 아시아의 아프가니스탄(4900t)·예멘(1만8000t) 등 총 11개국에 쌀 10만t을 지원할 예정이다. 쌀 10만t은 3개월간 약 260만명의 취약계층을 지원할 수 있는 규모라고 한다.

한국이 WFP 식량 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한 것은 지난 2018년부터다.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매년 5만t을 기부해 온 한국은 올해부터 공여량을 10만t으로 두 배로 늘렸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5월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확대세션에서 “유엔세계식량계획(WFP)을 통해 식량 위기 국가에 지원하는 양을 매년 5만t에서 10만t으로 확대하겠다”면서 “식량위기국에 대한 지원으로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3(한국·일본·중국) 비상쌀비축제를 확대하겠다”고 말했다.

올해 쌀 10만t을 지원한 한국의 식량원조 규모는 미국, 유럽연합(EU), 캐나다, 프랑스, 일본, 호주에 이어 세계 7위에 해당한다.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군산항에서 열린 쌀 출항식에서 “식량을 원조받던 나라가 원조하는 나라가 됐다”며 “식량원조를 통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역할과 의무를 다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 쌀의 품질이 좋아, 수혜국에서도 반응이 좋다”면서 “도움을 받던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위상이 달라진 한국의 스토리가 개발도상국에 주는 울림도 상당하다”고 덧붙였다.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과 내빈들이 4월 17일 전북 군산항에서 열린 쌀 10만톤 원조 출항 기념식에서 출항 버튼을 누르고 있다. /연합뉴스

◇쌀 남는다고 공여량 마구 늘리긴 어려워… “지속가능한 지원이 중요”

쌀 소비는 감소하는데, 쌀 생산량은 그만큼 줄지 않아 국내 쌀 과잉생산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를 해결할 방안으로 국제사회 쌀 공여량 확대를 말한다. 국내 남는 쌀을 국제사회에 기부하면 쌀 재고량을 줄여 국내 쌀 값을 안정시킬 수 있고, 세계 식량 문제 해소에도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제사회 쌀 기부량 확대는 이처럼 단순하지 않다. 우선 쌀 공여 방식은 정부 비축미를 바로 기부하는 ‘현물 납부’ 방식이 아니다. WFP 등은 공여국으로부터 쌀 기부량을 협의한 뒤, 이에 준하는 기부금을 각국 정부로부터 받는다.

대신 쌀은 공여국이 원하는 지역의 쌀 매입을 우선으로 한다. 매입 가격은 국제 쌀 시세를 기준으로 한다. 자포니카 품종 중에서도 영양가가 많은 고품질 쌀로 평가받는 한국산 쌀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인디카 품종보다 거래 시세가 6배가량 비싸다. 하지만 WFP는 인디카 품종 국제 시세에 맞춰 쌀을 매입한다.

한국 정부가 쌀 10만t을 시장에서 격리하기 위해 매입한 비용은 약 2400억원이지만, WFP가 이를 매입한 가격은 3600만달러(한화 490억원)이다. 여기에 수원국까지의 선적비용과 수원국에서의 분배까지 총 1000억원 가량의 재정이 소요된다. 정부가 해외에 쌀 10만t을 지원하기 위해 쓴 총 비용은 3400억원에 달한다. 쌀이 남는다고 해서 국제사회 공여량을 마구 늘리기 어려운 이유다.

정부 내에선 국제사회 기여 확대에 대한 기대감이 나오면서도 선뜻 포부를 밝히긴 어렵다는 반응이 나온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식량 지원은 대규모 재정이 들어가는 원조 사업”이라며 “장기적으로 20만t까지 공여량을 늘렸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만, 재정 상황도 봐가며 신중하게 접근을 해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도 “원조 약속은 신중하게 살펴야 한다. 특히 특정 지역을 우리가 지원하겠다고 했다가 지키지 못하면 해당 지역의 식량난이 더 심각해질 수 있다”며 “지속가능한 지원을 꾸준히 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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