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한국이 다리 놓으니 마음 열리고, 제방 올리니 신뢰 쌓였다
팡일만 해상 교량, 바다 건너편까지 7분
"수십 년 숙원, 한국 정부와 기업에 감사"
상습 침수 팜팡가, 기후변화적응사업 완료
우리 기업은 해외 진출, 개도국은 발전 계기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 남쪽으로 1,140㎞ 떨어진 민다나오 섬의 북쪽 탕구브(Tangub)시. 북동쪽 보홀해와 연결되는 팡일만(Panguil Bay)을 사이에 두고 남쪽 투보드(Tubod) 타운을 마주하고 있다. 지난달 23일 찾은 이곳에서는 팡일만 남북을 잇는 길이 2.5㎞의 교량 건설이 한창이었다.
최고 수심 25m의 수면을 뚫고 수직으로 솟은 34개의 기둥 위 다리에 오르니 길이 2,240m의 회색빛 콘크리트 도로가 팡일만 양쪽에 펼쳐졌다. 공정률은 91%. 교량 중앙 10m 정도를 더 연결하고 그 위에 아스팔트ㆍ교면 포장작업을 마치는 8월이면, 탕구브-투보드를 잇는 총 3,169m(접근도로 포함)의 왕복 2차선 팡일만 대교가 개통된다. 2020년 착공 후 4년 만에 필리핀에서 가장 긴 해상대교가 완공되는 것이다.
팡일만 대교 프로젝트는 한국수출입은행이 집행하는 대외경제협력기금(EDCF)1을 재원으로 우리 기업들이 설계와 시공을 맡은 대규모 공적개발원조(ODA) 사업이다. 사업비만 1억1,400만 달러(약 1,553억 원)에 달한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필리핀 대통령의 인프라 구축ㆍ건설 프로젝트인 ‘BBB(Build, Build, Build)’의 핵심 사업으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현 대통령도 승계한 프로젝트다.
작업은 순탄치 않았다. 빠른 유속과 거센 바람은 상시적이었다. 코로나19로 공사가 지연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안전을 담보할 수 없었다. 필리핀은 마닐라와 세부 등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이 우리 외교부가 발령한 여행경보 지역이다. 국토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민다나오 섬은 극히 일부만 여행자제(황색 경보) 지역일 뿐, 기자가 방문한 탕구브를 포함한 대부분은 출국권고(적색 경보)가 내려졌다. 팡일만을 끼고 투보드 타운을 육로로 가려면 여행금지(흑색 경보) 지역도 지나야 한다. 내외국인을 상대로 납치나 강도, 테러 등이 빈번하기 때문이다.
민다나오의 열악한 인프라는 이 지역 발전의 큰 걸림돌이었다. 공권력 약화를 불러 범죄가 들끓었다. 실제 탕구브 옆 도시 오자미즈는 ‘마약 공장’으로 불렸고, 두테르테 전 대통령의 마약과의 전쟁에서 총책이던 이 도시 시장과 그의 아내가 2017년 사살되기도 했다. 아시아개발은행(ADB)에 따르면, 2021년 기준 민다나오 섬 중부 이슬람 자치지역(방사모르)의 빈곤율은 필리핀 전체 빈곤율(18.1%)을 크게 웃도는 27.7%다. 필리핀 정부가 팡일만 대교 건설에 공을 들인 배경이다.
EDCF라는 한국 정부의 매력적인 원조, 한국 기업의 뛰어난 기술력은 필리핀의 개발 수요를 자극했다. 실제 팡일만 대교가 개통되면 육로 이용 시 편도 2시간 30분이 걸리던 탕구브-투보드 이동 시간은 7분으로 단축된다. 민다나오의 풍부한 농수산물, 자원 등 물류가 원활해지고, 인적 교류가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이 사업을 추진하는 필리핀 공공사업도로부(DPWH)의 말론 갈레리오 책임자는 “한국 정부의 EDCF 지원과 우수한 한국 기업의 도움으로 수십 년간 갈망하던 숙원을 이루게 돼 정말 감사하다”며 “교량을 중심으로 관광특별구역 개발 등 각종 경제활동이 활발히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는 올해부터 2026년까지 13조8,000억 원 규모의 EDCF를 승인하고 6조5,000억 원을 집행한다는 계획을 2월 발표했다. 이를 통해 2022년 16위던 ODA 순위를 2026년 10위까지 끌어올린다는 포부다. 특히 개발도상국 기후변화 대응과 디지털 전환 촉진에 지원을 확대한다는 목표를 제시했는데 7,107개 섬으로 구성된 도서국 필리핀은 이 목표에 부합하는 지역이다.
지난달 22일 찾은 팜팡가 지역 통합재난위험감축 및 기후변화적응 사업이 대표적이다. 이곳은 사팡 마라굴 강과 지류가 이어지면서 필리핀 국민 생선인 ‘틸라피아’ 생산 비중이 70%를 차지하는 양식장 밀집지역이다. 하지만 서쪽으로 팜팡가만과 인접해 우기(6~10월)에 만조와 겹치면 강물이 범람하는 상습침수지대기도 하다. 기후변화로 강수량이 늘면서 침수는 잦아지고, 양식장 피해는 커지면서 대책이 필요했다.
재원 마련에 고심하던 필리핀 정부가 2018년 EDCF에 손을 내밀었고, HJ중공업(옛 한진중공업) 등 한국 기업이 설계와 시공을 맡았다. 38.5㎞에 달하는 하천을 준설하고, 8㎞의 제방과 6개의 수문을 축조했으며, 교량과 인도교를 2개소씩 건설하는 1차 사업이 지난달 완료됐다. 수문은 지역 마루지(랜드마크)가 됐고, 일부 제방은 널찍한 도로로도 활용되고 있었다.
1987년 시작된 EDCF 지원은 시간이 지나면서 유무형의 성과를 내고 있다. 작년까지 58개국 525개 사업에 31조6,069억 원을 승인하고, 약 14조 원을 집행했다. 현지에 인프라가 들어서고 일자리 창출 등 지역 경제가 활성화하는 것은 가시적 성과다. 우리 기업의 해외 진출 교두보에 이어 사업 성공과 기술 전파에 따른 '한국'이라는 브랜드에 대한 신뢰 형성은 금액으로 따질 수 없는 부수적 성과다.
실제 팜팡가 프로젝트를 발주한 DPWH의 토머스 올라리아 책임자는 "입찰을 거치겠지만 2차, 3차 사업도 한국 기업과 함께하길 고대한다"고 밝혔다. 팡일만 대교 사업 감리를 맡고 있는 유신의 조태환 단장은 "비슷한 시기 이탈리아 감리업체와 중국계 시공사가 맡은 잠보앙가 교량 건설은 현재 공정률이 40% 수준인데 우리는 90% 이상"이라며 "한국 기업을 신뢰하고 선호하게 만드는 발판이 됐다는 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마닐라·탕구브·팜팡가(필리핀)= 이대혁 기자 selected@hankookilbo.com
Copyright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산모도 아기도 건강했는데… 해장국 먹고왔더니 아내가 쓰러졌다 | 한국일보
- "'새끼'가 '자식' 됐네"...MBC·SBS 드라마 본방 자막 시대의 이색 풍경 | 한국일보
- "사람 취급 못 받던 애"… 여친 살해 수능 만점 의대생 신상 털렸다 | 한국일보
- "억울하게 살해당한 동생, SNS도 못 닫아"... '의대생 살해' 유족 호소 | 한국일보
- 아이들 노린 테러? 8m짜리 공원 미끄럼틀에 박힌 '유리 조각' | 한국일보
- 한예슬 "유부녀 됐어요" 10세 연하 남친과 혼인신고 '깜짝 발표' | 한국일보
- 황혼육아 '할마빠'의 삭신은 멍든다… "금쪽같은 손주지만 힘든 것도 현실" | 한국일보
- 대전서 '맹견 70마리 탈출' 소동... 재난문자까지 보냈다 | 한국일보
- 강남역 빌딩 옥상서 의대생이 여성 살해...투신하려다 붙잡혀 | 한국일보
- 전통시장에 식판 등장?! 환경 위해 "용기 내" 봤습니다 | 한국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