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과 집념으로 소극장 시대 개척… 시대를 앞서갔던 연극인들의 영웅

손진책 연극연출가·전 국립극단 예술감독 2024. 5. 8.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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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임영웅 선생을 기리며… 손진책 연출가 추모 기고
7일 오전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린 고(故) 임영웅 선생 연극인장 영결식. 궂은비 속에 유인촌 문체부 장관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연합뉴스

한 시대를 비춰온 또 하나의 큰 별이 졌다. 이해랑, 차범석 선생의 계보를 잇는 한국 연극의 대부셨기에 애석한 마음 금할 수가 없다. 품 넓은 연극 스승으로 모시던 분이었기에 그 아픔이 더욱 크다.

선생을 생각하면 먼저 연극에 대한 뚝심과 애정, 열정이 떠오른다.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연출의 정교함, 연극에 관해선 한 치의 양보도 없으셨던 엄격함도 함께. 그러면서도 후배들에게는 늘 가르침을 주신 자상한 분이셨다.

국립극단이 법인화 과정에서 몸살을 앓던 2010년, 선생이 내게 예술감독을 맡아달라 하셨다. 국립극단에 누구보다 큰 애착을 갖고 있던 선생께서 뻔한 가시밭길, 무거운 짐을 내가 짊어져 주길 바라셨던 것이다. 나는 사양했다. 내 젊음을 바쳐 일군 극단 ‘미추’와 나만 바라보는 50~60명 극단 식구들을 생각해야 했다.

그렇게 한 달 반쯤 버텼던 어느날, 선생이 경기도 양주의 극단 건물 ‘미추산방’으로 찾아오셨다. 이미 사위가 어둑해진 저녁 7시쯤이었다. 마침 모든 배우와 스태프들이 모여 연극 ‘적도 아래의 맥베스’ 리허설을 진행할 참이었다. 선생은 “기다리면 되지” 하고 말씀하셨다.

리허설을 어떻게 마쳤을까. 기다리던 선생께 달려가 읍소했다. “연습실과 극장, 합숙소, 연극학교와 배우, 스태프들이 여기 다 있습니다. 여길 두고 제가 어떻게 국립으로 갑니까. 도저히 못 갑니다.” 내 말을 다 들으시곤 선생이 조용히 말씀하셨다. “그럼 내가 두 번을 더 오면 되겠구먼.” 선생께서 ‘삼고초려’ 하시겠다니, 나는 그 전에 그냥 두 손 다 들 수밖에 없었다.

손진책 연극연출가·전 국립극단 예술감독

선생은 긴 세월 오로지 한 길, 연극을 향해 늘 한결같은 걸음으로 뚜벅뚜벅 걸어오신 우리 연극인들의 ‘영웅’이셨다. 항상 정도를 걸으시며 완성도를 향한 집념과 성실, 최선을 다하시는 그 진지한 모습은 모든 연극인들의 귀감이 되고도 남았다.

1년 과정이었던 미추 연극학교 어느 해 졸업식에서 선생이 해주신 축사도 잊히지 않는다. 선생은 “지금 연극이 잊고 있는 게 연극의 ‘격(格)’이다. 여러분은 격이 있는 배우, 믿음을 가질 수 있는 배우가 돼라”고 말씀하셨다. 선생이야말로 연극인이 가져야 할 격조와 품격의 모범이셨다. 선생을 따라 늘 부족한 나 역시 늘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배우와 연극의 ‘격’을 강조해 말하곤 했다.

선생의 연극 인생은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동서양과 시대를 넘나들며 선구자적 개척정신으로 자유롭고 다양한 무대를, 그것도 정확하게 만드셨다. 1966년 한국 최초의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를 비롯, 초창기 뮤지컬을 개척했고, 창작극뿐만 아니라 번역극, 부조리극까지 여러 장르를 드나들며 우리 연극의 폭을 한층 넓히셨다. 그중에서도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처음 무대에 올린 일은 우리 연극사에서 획기적인 일이었다. 1969년 초연되어 50주년인 2019년까지 1500여 회에 이르는 공연을 통해 작품의 깊이와 넓이는 끝이 없다는 사실을 몸소 실천하시며 연출의 전범을 보여주셨다. 한국 연극에 새로운 충격을 준 선생의 업적이다. 그 사실은 앞으로도 우리 연극에 하나의 전설로 길이 남을 것이다.

선생은 항상 시대를 앞서간 분이셨다. 우리나라에선 처음으로 프로듀서 시스템이란 새로운 제작 체계로 ‘극단 산울림’을 만드셨다. 또 전 재산을 들여 설립한 연극 전용 ‘산울림 소극장’은 선생의 열정과 정신이 집약된 연극 산실로 그로부터 또 하나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거기서 수많은 격조 높은 작품들로 소극장 시대를 여셨다. 특히 박정자, 손숙, 윤석화와 함께한 ‘위기의 여자’,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등의 작품은 본격적인 중년 여성 연극시대를 열었다.

선생은 큰 나무이시기도 했다. 많은 후배들을 넉넉하게 껴안는 늘 푸르고 큰 나무셨다. 선생은 또 등불과 같았다. 한국 연극의 앞길을 밝히고 많은 연극인들을 이끌어주던 꺼지지 않는 빛이셨다. 후배 연극인들은 한국 연극을 한 단계 끌어올린 선생의 업적을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이다. 선생이 보여주신 그 열정, 정신을 길이 간직하고 더 한층 높은 수준으로의 연극에 정진할 것임을 머리 숙여 다짐한다.

임영웅 선생님! 영면화평 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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