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적 장면은 2회에… 궁금함이 정주행으로 이끌어

신정선 기자 2024. 5. 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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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콘텐츠 승부사들] [22] 한미연 영화 편집감독
지난 3일 서울 강남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한미연 편집감독이 영화 편집본을 체크하고 있다. 모니터에 그가 맡았던 영화 ‘댓글부대’의 한 장면이 보인다. /박상훈 기자

할리우드에는 없고 한국 영화에만 있는 독특한 직종이 있다. 촬영 현장에서 즉석으로 촬영본을 편집해 보여주는 현장 편집이다. 한미연(42) 편집감독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2017)와 ‘기생충’(2019), 김지운 감독의 ‘인랑’(2018)에서 현장 편집을 하며 정밀한 감각을 익혔다. 지난 3일 서울 강남구 스튜디오에서 만난 한 감독은 “원래 구상대로 초 단위까지 정확하게 편집돼야 만족하는 봉 감독과 여유 있게 찍어 작업하는 김 감독의 상반된 스타일을 통해 다양한 시각을 배웠다”고 말했다.

그는 가장 주목받는 1980년대생 영화인 중 한 명이다. 지난해 칸 영화제 비평가 주간 초청작 ‘잠’(감독 유재선)과 올해 미국 아카데미 국제 장편영화 부문 한국 출품작이었던 ‘콘크리트 유토피아’(감독 엄태화)가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지난 3월 개봉한 ‘댓글부대’, 박찬욱 감독이 제작해 연말 공개 예정인 넷플릭스 영화 ‘전,란(戰,亂)’의 편집도 맡았다.

편집감독은 한 영화를 30~40번은 본다. 처음부터 끝까지 뚫어져라 보는 횟수만 따져도 그렇다. 띄엄띄엄 훑어보는 건 수백 번을 헤아린다. 무조건 많이 본다고 판단의 날이 서지는 않는다. 자꾸 보면 객관성을 잃기 쉽다. 한 감독은 “수백 번 보다가 결론이 안 나면 제일 처음 했던 편집본을 다시 본다”며 “영화의 첫 관객으로 봤던 편집본이 최종 버전과 가장 가까운 때가 많다”고 말했다.

영화 편집이 캐릭터를 건드릴 때 고민이 깊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때는 이병헌(영탁)이 문제였다. 인간 군상이 다각적으로 드러나야 하는데 이병헌이 연기를 너무 잘해 다른 인물이 다 묻혔다. 특히 이병헌의 ‘아파트’ 열창이 워낙 강렬해 그 뒤론 ‘이병헌 원톱 영화’로 흘러갈 우려가 컸다. 논의 끝에 영탁이 귀신에 시달리며 죄책감이 강조되는 장면을 잘랐다. 한 감독은 “엄 감독이 같은 80년대생이라 뜻이 잘 통해 설득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연출자인 감독과 편집의 의견이 대립할 경우 어떻게 조율하느냐도 숙제다. ‘잠'은 그 차이를 그대로 둔 게 묘수가 됐다. 이선균이 귀신이냐 아니냐는 부분은 개봉 후에도 의견이 분분했다. 쓰고 연출한 유 감독은 이선균이 귀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만들었고, 편집한 한 감독은 귀신이라 생각하며 작업했다. 결국 영화를 먼저 관람한 봉 감독이 “알 듯 말 듯한 그 지점이 포인트”라고 조언해 상충하는 견해를 그대로 살렸고, 여러 해석을 낳으며 흥행도 성공했다.

최근엔 OTT 편집도 많이 했다. 넷플릭스 ‘마스크 걸’ ‘선산’ ‘기생수: 더 그레이’가 그의 작품이다. OTT 편집은 영화와 크게 다르다. 까딱하면 시청을 중단한다. 한 감독은 “승부는 2화 마지막 장면에서 난다”고 했다. 2화가 재밌으면 시리즈를 쭉 보게 된다는 게 업계 공식이다. 2화 마무리는 시나리오 쓸 때부터 연구하지만, 그래도 밋밋하면 편집으로 각을 세운다. 넷플릭스 ‘마스크 걸’ 2화에서 주연급으로 보였던 특정인이 살해당하는 것도 충격과 궁금증을 불러일으켜 3화 이후를 보게 하려는 의도적인 배치였다. ‘기생수: 더 그레이’는 일본 원작을 한국적으로 바꾸며 설명이 다소 필요했다. 원래 시나리오에는 설명 장면이 2화에 있었다. 그러나 2화가 늘어지면 안 된다는 판단에 편집 과정에서 설명을 2화에서 1화로 옮기고 2화에는 액션신을 집중 투입했다.

OTT 편집은 여러 시청 환경까지 고려해야 한다. 한 감독은 “제가 하는 OTT 작품은 TV, 컴퓨터, 아이패드, 휴대폰 등 시청자가 선택할 수 있는 모든 매체에서 반복해 틀어보고 체크한다”고 했다. 일부러 버스를 타고 휴대폰으로 가편집본을 들여다보며 화면상 좌우가 잘리거나 위아래 묻히는 부분은 없는지 확인하기도 한다.

숏폼 영상이 유행하면서 일부 영화는 빠르고 현란한 화면을 노리고 강박적으로 컷을 나눈다. 대개 영화는 2000~3000컷인데, 4000컷이 넘는 작품까지 나왔다. 한 감독은 “편집 속도가 빠르다고 영화에 몰입되는 게 아닌 것 같다”며 “좋은 영화는 편집이 보이지 않으면서 힘을 발휘해야 한다는 철학으로 일한다”고 말했다.

☞한미연

영화 ‘잠’ ‘콘크리트 유토피아’ 등을 작업한 편집감독. 국민대에서 영화 연출을 공부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영화 편집 석사 과정을 마쳤다. 전도연·정우성 주연의 영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2019·감독 김용훈)로 제41회 청룡영화상 편집상과 제7회 한국제작가협회상 편집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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