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체감 중산층’ 실종
1970년대 일본에선 ‘1억 총중류(一億總中流)라는 말이 유행했다. 국민 대다수가 자신을 중산층으로 여기는 풍요의 시대라는 의미다. 당시 일본인들은 대부분 이층집, 컬러TV, 승용차를 보유하며 고루 잘살았다. 1990년대 장기 불황이 닥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스태그플레이션에 고령화까지 겹치며 ‘1억 총활약’이란 말이 등장했다. 전업주부와 노인들도 취업 전선에 나서야 겨우 중산층 생활을 유지하는 ‘격차 사회’가 됐다는 의미다.
▶한국에서 ‘중산층(中産層)’은 학술적 개념으로 정립된 말이 아니다.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계층론에서 따온 중(中) 개념과 자산 유무로 계급을 나눈 카를 마르크스의 산(産) 개념을 합쳐서 만든 한국식 조어이다(서울대 사회학과 이재열 교수 설명). 모호한 개념이지만 중산층 확대는 좌우 불문 모든 정권이 지향했던 국정 과제였다. 노무현·박근혜 정부는 공히 ‘중산층 70% 시대’를 국정 목표로 제시했다.
▶고도 성장기였던 1980년대엔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여긴 국민 비율이 75%에 달했다. 미래에 대한 낙관이 넘치던 시절이었다. 1997년 외환 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가 중산층에 직격탄을 날렸다. ‘사오정’(45세 정년), ‘하우스 푸어’, ‘수저계급론’ 등 암울한 신조어가 등장하며 ‘체감 중산층’이 격감했다. 각종 소셜미디어가 상대적 박탈감을 더 부추겼다. 객관적 지표로는 중산층이지만 스스로를 ‘하류층’으로 여기는 자학 증상이 심해졌다.
▶엊그제 발표된 한국개발연구원(KDI)의 ‘한국의 중산층은 누구인가’ 보고서는 자학 증세의 실상을 보여준다. 월소득 700만원 이상 고소득 가구 구성원 100명 중 11명만 자신을 상층으로 여긴다. 76명은 중층으로, 12명은 하층으로 생각한다. 자산·소득 기준 중산층의 40%가량은 자신을 ‘하층’으로 인식한다. 고학력·전문직일수록 ‘자학 증세’가 더 심하다.
▶영국 경제학자 허시는 경제 성장이 일정 단계에 이르면 물질재 공급이 주는 밀물 효과(밀물은 모든 배를 띄운다)는 없어지고, 지위재의 중요성이 커진다고 했다. 자기 집을 갖게 돼도 만족이 안 되고, 서울 강남의 ‘똘똘한 한 채’에 대한 갈망이 더 커지는 것이 좋은 예다. 소득, 생활 수준으로는 한국은 이미 선진국이지만, 국민 70%는 아직 선진국이 아니라고 답한다. 삶이 팍팍하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명문대 진학, 좋은 일자리를 둘러싼 살벌한 경쟁, 세계 최악의 자살률·출산율·노인 빈곤율 등을 보면 ‘체감 중산층’의 격감이 이해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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