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가 여전히 중요한 이유 [강석기의 과학풍경]

한겨레 2024. 5. 7.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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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래어를 쓰는 과정에서 용법이 다소 이상하게 바뀌는 경우가 있다.

섹스가 그런 예로 성(또는 성별)을 뜻하는 맥락으로는 사용하지 않고 성행위나 성관계 대신 쓰는 말로 굳어졌다.

이때 섹스는 생물적 성이고 젠더는 사회적 성을 뜻하는데, 갈수록 후자의 비중이 커져 영어권에서 서류 성별란에 sex 대신 gender를 쓰는 추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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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면역반응에는 다양한 요인이 영향을 미친다. 이 가운데 나이와 생체리듬, 식단, 체중 등 삶의 과정에서 비롯된 요인도 있지만, 생물적 성별에 따른 성호르몬과 인체미생물 요인의 영향도 크다. 그 결과 남성은 여성보다 면역반응이 덜해 감염과 종양에는 취약하지만 천식이나 자가면역질환 위험성은 낮다. 애슐리 매스틴(A. Mastin)/사이언스(Science) 제공

강석기 | 과학칼럼니스트

외래어를 쓰는 과정에서 용법이 다소 이상하게 바뀌는 경우가 있다. 섹스가 그런 예로 성(또는 성별)을 뜻하는 맥락으로는 사용하지 않고 성행위나 성관계 대신 쓰는 말로 굳어졌다. 그러다 보니 2000년대 들어 활발히 논의되는 ‘섹스와 젠더’에 대해 얘기할 때 뭔가 어색하다. 이때 섹스는 생물적 성이고 젠더는 사회적 성을 뜻하는데, 갈수록 후자의 비중이 커져 영어권에서 서류 성별란에 sex 대신 gender를 쓰는 추세다.

섹스로 쓰든 젠더로 쓰든 뭐가 다르냐 싶지만 차이는 엄청나다. 섹스는 바꿀 수 없지만 젠더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바꿀 수도 있다. 독일에서는 전문가 소견 없이 자신의 결정으로 젠더를 바꿀 수 있는 법이 지난 4월12일 통과됐을 정도로 성 관념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

이러다가 영어권에서도 일상에서 sex의 용법이 우리처럼 성관계로 제한되는 것 아닐까. 실제 과학계조차 생물적 성 차이에 관한 연구를 꺼리는 분위기다. 지난달 학술지 ‘네이처’에는 이런 경향에 우려를 표하며 생물적 성별 연구가 여전히 중요하다는 주장을 담은 사설과 두 편의 기고문이 실렸다.

이에 따르면 특히 의학 연구에서 질병을 이해하고 최선의 치료법을 찾으려면 생물적 성별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특정 질병은 생물적 성별에 따라 발병률에 큰 차이를 보인다. 특히 면역과 관련된 질병에서 두드러져, 면역계가 자기 조직을 공격하는 자가면역질환의 발병률은 여성이 남성의 4배이고 암은 거꾸로 남성이 1.4배에 이른다(남녀 공통 암만 따지면 차이가 더 크다). 이런 현상을 설명하는 메커니즘을 밝히면 좀 더 효과적인 치료법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지난 2월 학술지 ‘셀’에는 여성에서 자가면역질환이 흔한 원인이 X염색체 때문임을 밝힌 논문이 실렸다. 남성의 성염색체는 XY이고 여성은 XX라 여성에서는 여분의 X염색체를 감싸 잠재우는 불활성화 메커니즘이 진화했다(안 그러면 X염색체에 있는 유전자의 발현량이 많아 균형이 깨진다). 그런데 이 과정에 관여하는 단백질을 외부 항원으로 오인해 항체가 만들어지면 자기 세포를 공격해 자가면역질환이 생길 위험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남성보다 여성에서 피부 트러블이 잦은 이유도 밝혀졌다. 얼핏 여성은 피부가 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지난달 학술지 ‘사이언스’에 실린 논문에 따르면 그 반대로 피부 면역계가 외부 자극에 강하게 반응해 생긴 역효과다. 여성의 피부 면역계는 병원체 공격에 더 잘 대응하지만 때로는 염증 반응이 지나쳐 빈대 잡다 초가삼간 태우는 꼴이 된다. 면역반응을 억제하는 작용을 하는 남성호르몬의 수치가 낮아 고삐가 풀린 셈이다.

지난 2022년 발표한 한국 성인 평균 키를 보면 여성은 159.6㎝이고 남성은 172.5㎝로 12.9㎝나 차이가 난다. 영양 상태 등 다른 조건이 비슷할 때 생물적 성별이 결정적 변수가 된다. 키처럼 직관적이지는 않지만, 우리 몸에는 생물적 성별이 주요 변수인 특성이 많을 것이고 이를 외면하지 않고 연구해 이해하려는 과학자의 노력은 결국 우리 삶의 질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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