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AI·원자력까지… 발목 잡힌 `미래먹거리` 법안들

최상현 2024. 5. 7.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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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변전시설부터 고준위방폐장 등
주민반발 따른 교착상태 타개법안
국회통과 미뤄지며 기업들 발동동

미래 먹거리를 위한 법안들이 국회의 '직무유기'에 막혀있다. 반도체와 AI 경쟁력과 직결된 법안부터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와 원자력 발전소의 정상 가동이 걸려있는 법안들이 국회서 낮잠을 자고 있는 것이다. 기업들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우리 반도체 기업들은 초격차에 사활을 걸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주요 기업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2047년까지 622조원을 들여 13개의 생산팹과 3개의 연구팹을 신설하고,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단지를 꾸린다. 용인 클러스터가 제대로 가동되기 위해서는 10GW 이상의 추가 전력이 필요할 것으로 전망된다. 수도권 전력 사용량의 4분의 1에 해당한다. 수도권에 집중되는 데이터 센터도 앞으로 6GW의 전력이 필요하다. 현재의 전력망으로는 감당이 불가능한 수준이다.

갈수록 늘어나는 신재생에너지도 전력망에 부담을 주는 요인이다. 발전량이 들쭉날쭉한 신재생에너지 특성상 화력·원자력 등 기존 발전 방식 대비 5배가량의 송전선로 확보가 필요하다. 태양광 발전 시설이 집약한 호남 지역의 경우 미흡한 전력계통 때문에 설비를 다 짓고도 전력을 생산하지 못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이같은 상황을 극복하려면 대규모 전력망 건설이 필수적이지만, 주민 반대가 걸림돌이다. 한전 관계자는 "주민 설득에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대규모 송전선로를 하나 건설하려면 수십 개에 달하는 마을로부터 모두 동의를 얻어야 해 진전이 더디다"며 "주요 송전선로 건설이 10년 이상 지연된 사례도 있다"고 했다.

국회에 계류된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전력망 특별법)은 이같은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한 법이다. 345kV 이상 송·변전설비의 건설과 관련해 지역 주민과의 갈등 조정·중재 역할을 전담하는 국가전력망확충위원회를 설치하고, 복잡한 인허가 절차도 관계부처 협력을 통해 빠르게 풀어내는 내용이 골자다.

원전의 지속 가능성도 국회에 볼모로 잡혔다.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시설 등에 관한 특별법(고준위법)이 통과되지 못하면 사용후핵연료 포화로 원전이 멈춰설 판이다. 우리나라는 중·저준위 방폐장을 2015년부터 운영하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고준위 폐기물은 처리 방법을 찾지 못해 원전에 임시로 적치하고 있다. 이를 영구적으로 처리하는 시설인 고준위 방폐장은 입지 선정부터 건립까지 최소한 30년 이상 걸린다. 반면 원전 내 저장시설은 2030년부터 한빛원전, 한울원전, 고리원전 순으로 순차적 포화 수순이다.

극심한 주민 반발을 넘어 고준위 방폐장의 입지를 선정하려면 국가가 안전성과 보상안을 보증하는 특별법 제정이 필수적이다. 국제 사례를 비춰봐도 특별법 없이 고준위 방폐장 부지 선정에 성공한 경우가 없다. 한국과 인도를 제외한 다른 원전 상위국들은 일찌감치 특별법을 통해 원전 공백에 대비했다. 핀란드는 오는 2025년부터 고준위 처분장을 운영할 예정이지만, 우리나라는 당장 법안이 통과돼도 2054년에야 방폐장이 완성된다.

황주호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은 지난 3월 기자 간담회에서 "최악의 시나리오지만 대만 사례처럼 가동을 멈춰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지난 2016년 대만 궈성 원전 1호기는 사용후핵연료 저장조 포화로 연료 보충이 불가능해져 가동이 중단된 바 있다.

'K칩스법(반도체지원법)'이라고 불리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은 반도체·2차전지를 비롯한 국가전략기술에 시설투자를 하면 15~25%의 세금을 돌려주는 제도로 올해 말에 종료된다. 현재 국회에는 K칩스법 일몰을 2030년까지 6년 연장하는 개정안이 계류 중이지만, 거야 정국에 K칩스법은 뒷전으로 밀려있다. 지난해 K칩스법이 논의될 당시 여당은 2030년까지 세액공제율을 대기업 20%, 중견기업 25%로 높이자는 입장을 내놓은 반면, 야당은 재벌 특혜라며 반대하며 각각 10%, 15%를 제시한 바 있다.

총선 결과 여소야대 정국이 한층 더 심해지면서 재계의 불안감은 더 커지고 있다. 여야는 앞선 4·10 총선 정국에서 모두 K칩스법을 추가로 연장하겠다는 공약을 내놨지만 22대 국회 개원과 하반기 국정감사와 예산안 심의 등 주요 일정을 감안하면 시간이 촉박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전문가들은 미국, 일본은 자국에 반도체 라인을 유치하고 내재화하기 위해 대규모의 보조금 지급 경쟁까지 펼치는 상황에서 유일한 인센티브인 K칩스법마저 일몰될 경우 투자 위축은 물론 국가 첨단산업 벨류체인이 약화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첨단산업 투자분에 대한 보조금이 없고 법인세율까지 높아 보조금 전쟁 국면에 국내 기업의 투자가 외국으로 빠져나가는 '엑소더스'가 심해질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반도체는 투자를 선행해야 2~3년 후에 효과를 보는 산업인데 한국은 경쟁국에 비해 속도가 느리다"며 "각국 정부에서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만큼 한국도 칩스법은 물론 보조금 지급 등의 혜택을 늘리고 가능하면 해외 기업도 많이 유치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글로벌 각국이 AI(인공지능) 전쟁을 벌이는 가운데 국회에서 장기 표류 중인 '인공지능 산업 육성 및 신뢰 기반 조성에 관한 법률안'의 조속한 통과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이른바 'AI기본법'이라 불리는 이 법안에는 AI 산업 육성과 부작용 최소화를 위한 법적 근거가 함께 담겨있다. AI 기업들이 규제의 불확실성을 딛고 본격적으로 투자하고, 이용자들은 AI의 위험성과 부작용을 피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판이다.

이 법안은 2021년 7월 정필모 더불어민주당 의원안부터 2022년 12월 윤두현 국민의힘 의원안까지 여야에서 개별 발의된 7개안을 과기정통부가 병합한 것이다. 당초 여야 합의로 빠른 국회통과가 점쳐졌지만 지난해 2월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법안2소위 통과 이후 1년 3개월째 상임위에 계류 중이다.

과기정통부가 그간 논의 결과를 반영한 수정안을 내놓고 입법에 힘쓰고 있지만 여야의 정쟁으로 발목이 잡힌 상태다. 과방위가 지난 1월 이후 이날까지 120일 동안 열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AI업계는 AI기본법의 조속한 국회통과만을 기다리고 있다. 관련 법제도가 미비해 불확실성이 계속되면 AI 경쟁력과 안전성이 모두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EU(유럽연합) AI법을 비롯해 세계 각국이 AI 관련 법제도를 마련하는 상황에서 'AI G3'를 목표로 삼은 정부 또한 급하긴 마찬가지다. 회기를 넘겨 폐기되면 논의가 장기화될 우려도 있다. 전문가들은 AI기본법으로 기본적인 틀을 시급히 갖추고 기술발전과 사회논의에 따라 수정·보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AI기본법이 통과되려면 과방위 전체회의와 법사위, 국회 본회의를 거쳐야 한다. 관계자들은 이달 셋째주 과방위가 열려 법안이 다뤄지면 회기 내 통과가 불가능하진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를 위해 국무총리와 과기정통부 장관이 목소리를 내고 2차관이 의원실을 찾아다니고 있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아직 기회는 남아있다. 국회와 적극 소통할 것"이라고 말했다.팽동현·최상현·윤선영기자

dhp@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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