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고 영롱한 물방울에 50년 바친 김창열 화백

송경은 기자(kyungeun@mk.co.kr) 2024. 5. 7.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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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름한 검붉은 빛의 덤불 속처럼 보이는 공간.

그 위에 드문드문 물방울이 영롱한 빛으로 맺혀 있다.

크고 작은 물방울들이 햇빛을 반사시키며 영롱하게 빛났고, 그 순간 캔버스는 한 폭의 그림처럼 보였다.

처음 물방울을 발견한 그날 이후 김창열 화백은 오로지 물방울에만 매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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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현대 3주기 회고전
미공개 희귀작 대거 펼쳐

어스름한 검붉은 빛의 덤불 속처럼 보이는 공간. 그 위에 드문드문 물방울이 영롱한 빛으로 맺혀 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천자문이다. 마음을 갈고닦은 것일까. 화면 가득 쓰인 한자들은 서로 겹치고 겹쳐 켜켜이 쌓여 있다. 깊은 공간감이 느껴지지만 물방울은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반듯한 표면에 맺혀 있을 뿐이다. 이 초현실적인 장면을 담은 작품은 이른바 '물방울 작가'로 불리는 김창열 화백(1929~2021)의 1990년작 '회귀 S.H. 9016'이다. 그가 평소 자주 사용했던 캔버스나 마(麻)천, 유화물감이 아닌 한지와 먹, 아크릴릭 물감을 사용해 완성한 희귀작이기도 하다.

김창열 화백의 작고 3주기 회고전 '영롱함을 넘어서'가 6월 9일까지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열린다. 김 화백의 작업 궤적을 총망라한 것으로, 1970년대 초반 작가의 초기 물방울 작품부터 2010년대 후반 작품까지 폭넓게 아우른다.

물방울을 소재로 한 김창열 화백의 집요한 여정이 시작된 것은 197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재활용을 위해 무심코 물을 뿌려 뒀던 캔버스에서 물방울이 그에게 처음 다가왔다. 크고 작은 물방울들이 햇빛을 반사시키며 영롱하게 빛났고, 그 순간 캔버스는 한 폭의 그림처럼 보였다. 그때의 감동을 김창열 화백은 '공간' 1976년 6월호에 실린 대담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캔버스를 뒤집어놓고 직접 물방울을 뿌려 보았어. 꺼칠꺼칠한 마대에 매달린 크고 작은 물방울의 무리들, 그것은 충분히 조형적 화면이 성립되고도 남질 않겠어. 여기서 보여진 물방울의 개념, 그것은 하나의 점이면서도 그 질감은 어떤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는 새로움의 발견이었어. 점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감도라 할까. 기적으로 느껴졌어."

김창열 '회귀 S.H. 9016' 갤러리현대

처음 물방울을 발견한 그날 이후 김창열 화백은 오로지 물방울에만 매달렸다. 이듬해인 1972년 그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살롱전 '살롱 드 메'에서 물방울 회화를 세상에 처음 선보였다. 나아가 그는 동양철학의 수행과 성찰, 회귀의 정신이 담긴 언어를 좇아 천자문과 도덕경 등의 글귀를 화폭에 새기기 시작했다.

김창열 화백은 평생에 걸쳐 물방울을 끊임없이 재검토하고 해체하며 시험대 위에 올려놨다. 피상적인 환상을 깨고 그 이면에 숨겨진 회화와 예술의 본질을 들여다보고자 했다. 실제 같지만 작가에 의해 철저히 조형된 물방울은 때로는 중력·빛 같은 자연의 물리 법칙을 거스르며 역동적인 모습으로 초현실적인 장면을 연출하기도 하고, 때로는 모래·나뭇잎 등 실제 사물 위에 올려져 현실과 가상 사이의 간극을 좁히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1979년작 '물방울 CSH 27-1'이다. 물방울이 표면에 흡수된 자국이 있지만 화면 가운데 모인 물방울들은 여전히 영롱하게 빛난다. 점성이 있는 물질처럼 방울이 서로 엉겨 있다. 또 다른 1976년작에선 화면 위 공간에서 중력이 동시에 두 가지 방향으로 작용한다. 모두 현실에선 있어날 수 없는 일이지만, 작가가 물방울의 다양한 특성들을 토대로 새로운 가능성을 가늠해보고자 했던 고민의 흔적들이다. '회귀' 연작에서도 다양한 변주가 나타난다. 물방울은 표면의 글자를 확대하거나 가린다. 일례로 1997년작인 '회귀 DRA 97009'에서 물방울 옆에 무심한 듯 칠해진 먹 자국은 글자를 가리며 미지의 공간을 끌어들인다.

[송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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