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카페] 중세 귀부인의 반려 다람쥐, 전염병의 시발점이었나?

이영완 기자 2024. 5. 7.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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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영국 유적지의 인간과 다람쥐 유골 분석
한센병 원인균의 DNA, 같은 종류로 확인
다람쥐는 모피뿐 아니라 반려동물로도 인기
인간과 다람쥐 사이 병원균 오가며 감염
독일 화가 한스 홀바인이 1526년에서 1528년 사이에 그린 ‘다람쥐, 찌르레기와 같이 있는 여인’ 초상화./위키미디어

독일 화가 한스 홀바인은 1526년에서 1528년 사이에 ‘다람쥐, 찌르레기와 같이 있는 여인’이라는 초상화를 그렸다. 그림의 주인공은 영국 헨리 8세의 궁정에서 일했던 프랜시스 러벨 경의 아내인 앤 러벨로 추정된다. 당시 영국에서는 다람쥐가 반려동물로 인기가 높았다.

그림은 편안한 분위기지만 실상은 달랐을지 모른다. 중세 영국에서 다람쥐가 인간에게 한센병을 퍼뜨렸을 가능성이 DNA 연구를 통해 제기됐다. 당시 사람에 감염됐던 병원균이 다람쥐에서도 나왔기 때문이다.

◇중세 인간과 다람쥐 유골에서 같은 병원균 나와

영국 레스터대의 고고학자인 사라 인스킵(Sarah Inskip) 교수와 스위스 바젤대 환경과학의 베레나 슈네만(Verena Schünemann) 교수 연구진은 지난 3일(현지 시각) 국제 학술지 ‘커런트 바이올로지’에 “중세 영국 유적지에서 나온 DNA를 통해 당시 붉은 다람쥐가 사람에게 한센병을 일으킨 병원균의 숙주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한센병은 한센균(Mycobacterium leprae)에 감염돼 발생하는 만성 감염증 질환이다. 노르웨이 의사 한센이 처음으로 환자에서 병원균을 발견해 한센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피부와 말초 신경에 감염되면서 피부조직을 손상하고 감각마비를 부른다. 선진국에서는 사라졌지만,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미의 저개발국가에서는 매년 환자가 20만명 이상 발생한다.

먹이를 먹고 있는 붉은 다람쥐. 중세 영국에서 인간에게 한센병을 퍼뜨렸을 가능성이 제기됐다./Peter Trimming/flickr

2016년 영국과 스위스 과학자들은 영국의 붉은 다람쥐 사체에서 한센균을 발견했다. 이듬해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있던 인스킵 교수는 중세 영국과 덴마크, 스웨덴 사람들은 오늘날 영국의 붉은 다람쥐와 비슷한 한센병을 앓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중세 사람들이 다람쥐를 통해 한센균에 감염됐을 가능성이 있다.

연구진은 영국 남부 햄프셔주 윈체스터시에서 나온 600~900년 전 인간 유골과 900~1000년 전 다람쥐의 뼈를 분석했다. 두 유골에서 유전물질인 DNA를 추출해 해독한 결과, 모두 비슷한 한센균이 나왔다. 인스킵 교수는 “중세 다람쥐에서 나온 한센균은 오늘날 다람쥐보다 중세 인간에서 나온 균주와 더 가까웠다”며 “중세 영국에서 다람쥐와 인간 사이에 한센병이 퍼졌음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다람쥐 모피 무역 중심지에서 감염 추정

연구진이 윈체스터시의 유적지를 조사한 것은 이곳이 중세 시대에 다람쥐 모피 무역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중세 시대 다람쥐 모피는 옷의 안감으로 인기가 높았다. 당시 윈체스터에는 모피 무역상과 재단사가 모여 살았을 뿐 아니라 한센병 환자를 위한 병원도 있었다.

연구진은 모피 장인이 살았던 곳에서 나온 다람쥐 뼈와 한센병 병원의 인간 유골을 분석했다. 둘 다 한센병의 특징을 갖고 있었다. 연구진은 세 사람과 다람쥐 한 마리의 유골에서 한센균의 유전자를 발견했다. 연구진은 유적지에서 나온 동물의 유골에서 한센균을 확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밝혔다. 물론 한센균이 같았다고 꼭 다람쥐가 사람에게 병원균을 퍼뜨렸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중세 영국 윈체스터시의 모피 공방터에서 나온 붉은 다람쥐 뼈(왼쪽)와 한센병 환자 병원에서 나온 인간 발가락뼈(오른쪽). 유전자를 분석했더니 같은 한센균이 나왔다. 왼쪽 아래는 15세기 책에 그려진 다람쥐이며 오른쪽 위는 12세기 책에서 다람쥐 모피로 안감을 댄 옷을 입은 인물./Current Biology

인스킵 교수는 “인간과 다람쥐 사이에 병원균이 탁구공처럼 오갔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처음이 아니었다고 해도 다람쥐를 통해 인간이 한센균에 감염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남미에서 인간이 아르마딜로에게 한센균을 퍼뜨렸다가, 다시 아르마딜로에서 인간으로 전염되는 경우도 생겼다. 바젤대의 슈네만 교수는 “중세 윈체스터시에서는 한센균에 전염될 기회가 많았다”며 “한센병 환자를 위한 병원과 모피 무역 외에도 당시 기록에 따르면 사람들이 다람쥐를 반려동물로 기르는 일이 많았다”고 밝혔다.

과학자들은 전염병이 퍼질 때 인간만 보면 숙주 동물과의 관계를 놓쳐 조기에 막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인스킵 교수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동물 숙주는 질병의 출현과 지속 가능성을 이해하는 데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고 말했다.

미국 조지아대 수의대의 엘리자베스 울(Elizabeth Uhl) 교수는 사이언스지 인터뷰에서 “이번 연구는 오늘날 질병을 연구할 때 역사와 생태를 고려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보여준다”며 “오늘날 다람쥐가 사람을 감염시킨다는 증거가 없지만, 과거의 감염 사례를 알면 미래의 위험을 예측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1886년 러시아 연구진이 키르기즈스탄의 이식 쿨 호수 근처에서 발굴한 무덤. 1338년 사망한 사람의 유골에서 유럽 흑사병의 기원이 되는 페스트균이 발견됐다./A.S. Leybin, August 1886

◇유전학, 고고학 손잡고 14세기 흑사병의 진원지 찾아

14세기 유럽을 휩쓴 흑사병(黑死病)도 동물이 인간에게 옮긴 치명적인 전염병이다. 과학자들은 이번처럼 유골에서 나온 병원균의 유전자를 분석해 흑사병이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에서 시작됐음을 확인했다. 이곳은 실크로드가 지나가는 지역이어서 중세 무역상들이 흑사병을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퍼뜨린 것으로 추정된다.

페스트는 쥐와 벼룩이 옮기는 페스트균(Yersinia pestis)이 유발하는 감염병이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1346년 몽골군이 흑해 크림반도의 카파항을 포위 공격하면서 유럽에 흑사병이 퍼졌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14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페스트 대유행인 흑사병으로 5000만명 이상이 사망했다. 흑사병이라는 이름은 환자의 피부가 검게 변하는 증상 때문에 붙었다.

과학자들은 유럽 흑사병 희생자들의 유골에서 나온 페스트균이 이미 돌연변이가 많이 생긴 상태였다는 점에서 다른 곳에서 옮겨왔다고 추정했다. 먼 거리를 이동하면서 돌연변이가 생겼다는 뜻이다. 시발점은 중앙아시아로 지목됐다. 그곳에 있는 설치류의 페스트균이 유럽 페스트균의 시조로 추정되는 종류와 유전자가 흡사했기 때문이다.

연구진은 19세기에 발굴된 무덤이 흑사병의 진원지라고 밝혔다. 1886년 러시아 학자들이 키르키스스탄 북쪽의 이식 쿨 호수 근처에서 1338년 매장된 무덤을 발굴했다. 무덤의 묘비에는 시리아어로 ‘이곳은 유행병(페스트)으로 죽은 신자 산마크의 무덤’이라고 적혀있었다. 중세사 연구자인 슬라빈 교수는 러시아 발굴단의 기록을 통해 당시 산마크를 포함해 최소한 상인 118명이 유행병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유전학자와 고고학자가 손을 잡고 흑사병의 진원지를 찾아낸 것이다.

참고 자료

Current Biology(2024), DOI: https://doi.org/10.1016/j.cub.2024.04.006

Nature(2022), DOI: https://doi.org/10.1038/s41586-022-04800-3

Journal of medical Microbiology(2017), DOI: https://doi.org/10.1099/jmm.0.000606

Science(2016), DOI: https://doi.org/10.1126/science.aah3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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