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코 인사이드] 세 시즌 풍미한 브랜드, 짧았던 그의 프로농구 경험

이재승 2024. 5. 6.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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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009시즌과 2009~2010시즌에 KBL을 누빈 빅맨이 있었다. 프로농구에서 두 시즌을 보낸 그는 전주 KCC(현 부산 KCC)와 서울 삼성을 거쳤다. KCC에서 첫 우승을 달성했고, 이후 재계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트레이드를 경험했다. 짧고 굵었던 그의 KBL 생활은 그렇게 끝이 났다.

 

대학 시절
뉴욕주 미들랜드 출신인 브랜드는 농구에 두각을 보였다. 큰 신장을 갖추고 있는 데다, 안쪽에서 부드러운 움직임을 자랑하며 주가를 높였다. 고교 시절 돋보인 그는 메사추세츠대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대학에서는 고교 시절처럼 많은 역할을 맡기 어려웠다. 기존 전력이 확실하게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
 

브랜드는 첫 시즌인 1999~2000시즌에 29경기를 나섰다. 신입생임에도 코트를 꾸준히 밟았다. 경기당 13.1분을 소화했고, 평균 4.3점(필드골 성공률 : 51.9%, 자유투 성공률 : 51.6%) 3.3리바운드를 기록했다. 팀 내 평균 득점 5위. 신입생이었지만, 입지를 나름 굳혔다. 다만, 평균 4점대를 올리고도 팀 내 득점 상위권. 메사추세츠의 전력이 돋보이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2학년이 된 그는 주전 자리를 꿰찼다. 30경기에 나선 브랜드는 그 중 23경기를 주전으로 나섰다. 평균 21.8분 동안 8.4점(필드골 성공률 : 46.0%, 자유투 성공률 : 66.3%) 4.7리바운드 1.1블록슛으로 나아진 퍼포먼스를 보였다. 컨퍼런스 기량발전상(MIP)으로 주가를 높였다.
 

고학년이 된 브랜드는 여유를 안았다. 27경기에 나선 그는 경기당 28.5분을 뛰었다. NCAA 진출 이후 가장 많은 시간을 소화했고, 팀의 주요 전력으로 거듭났다. 9.3점(필드골 성공률 : 43.2%, 3점슛 성공률 : 35.0%, 자유투 성공률 : 66.1%) 5.7리바운드 1.4어시스트에 1블록슛을 기록했다. 대학 진학 이후 가장 돋보이는 시즌이었다. 또, 기존 옵션에 외곽슛까지 곁들였다.
 

브랜드는 4학년 때 잠시 주춤했다. 27경기에서 15경기만 주전으로 뛰었다. 주전 경쟁에서 밀린 브랜드는 평균 21.1분 동안 7.6점(필드골 성공률 : 44.7%, 3점슛 성공률 : 33.3%, 자유투 성공률 : 73.1%) 4.1리바운드 1.1어시스트에 머물렀다. 미국에서 프로 선수로 자리잡기 어려웠다.

전주에서
여러 국가를 오간 브랜드는 2008년 여름 KBL을 노크했다. 외국선수 드래프트에 명함을 내민 그는 KCC의 부름을 받았다.
 

당시 KCC는 많은 기대를 받았다. 서장훈이라는 리그 최고 빅맨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 게다가 2008 국내신인선수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1순위 지명권을 손에 넣었다. 주저하지 않고 하승진을 지명했다. 물론, 이들이 동시에 뛰기에는 겹치는 측면이 있었으나, 두 선수는 상대를 주눅 들게 하기 충분했다.
 

그러나 KCC는 좀처럼 위력을 드러내지 못했다. 시즌 초반에 주춤했다. 하지만 브랜드는 묵묵하게 자기 몫을 해냈다. 서장훈과 뛸 때는 안쪽을 지켰고, 하승진과 호흡을 맞출 때에는 하이포스트에서 정확한 연계 플레이로 동료들의 움직임을 도왔다.
 

또, 하승진이 스크린 이후 대처가 늦기에, 브랜드가 스크린으로 국내 선수들의 활동을 자유롭게 했다. 반대로, 하승진이 뛸 때, 브랜드는 수비 부담을 겪지 않았다. 또, 상대 국내 선수가 브랜드를 막기도 했기에, 브랜드는 공격에서 좀 더 위력을 드러냈다.
 

무엇보다 기복이 없었다. 늘 평균 기록을 세웠고, 영리했다. 상대 외국 선수가 본인을 막으면, 브랜드는 외곽으로 나와 상대 안쪽 수비를 흔들었다.
 

그러던 도중, KCC가 결단을 내렸다. 잘 채워진 안쪽 전력에 비해, 외곽이 다소 취약했기 때문. 안쪽을 휘어 잡을 수 있는 브랜드와 서장훈이 있는 것을 고려하면, 외곽 지원이 아쉬웠다. 아쉬움을 느낀 KCC는 칼 미첼을 대체 영입하기로 했다.
 

미첼이 들어오면서, KCC의 외곽에 숨통이 트였다. 브랜드도 좀 더 돋보일 수 있었다. 미첼이 승부처에서 활약했기 때문. 하지만 서장훈의 입지가 줄어들었다. 서장훈의 역할과 출전 시간도 감소했다. 시간이 고팠던 서장훈은 트레이드를 요청했다.
 

KCC는 시즌 중후반에 서장훈을 인천 전자랜드(현 대구 한국가스공사)로 보냈다. 대신, 강병현(현 창원 LG 전력분석원)과 조우현, 정선규(현 용산고 코치) 등을 받았다. 특히, 유망주인 강병현이 백코트 전력에 힘을 실었다.
 

하승진과 브랜드가 안쪽에서 역할을 다했고, 미첼과 강병현이 외곽 공격을 잘 풀어나갔다. KCC는 더욱 짜임새를 갖췄다. 31승 23패로 리그 3위에 올랐다. 플레이오프에 나선 KCC는 시즌 중 트레이드를 단행했던 전자랜드와 마주했다.
 

KCC는 1차전을 따냈다. 그러나 2차전과 3차전에서 서장훈과 리카르도 포웰의 활약에 패했다. 그러나 하승진이 팀을 구했고, KCC는 4차전을 잡았다. 여세를 몰아 5차전까지 따내면서, 2년 연속 4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그리고 원주 동부(현 원주 DB)와 4강 플레이오프에서 만났다. KCC는 이번에도 1차전을 내줬다. 그러나 2차전을 102-85로 이겼다. 분위기를 확 바꿨다. 3차전을 내주긴 했지만, 4차전을 잡았다. 5차전을 87-64로 승리. 챔피언 결정전으로 나섰다.
 

챔피언 결정전에서 테런스 레더와 애런 헤인즈의 서울 삼성을 만났다. 챔피언 결정전에서도 첫 경기를 내줬다. 그러나 이어진 세 경기를 내리 따냈다. 하지만 5차전과 6차전을 모두 내줬다. 그렇지만 하승진이 부상 투혼을 불살랐고, 추승균이 24점으로 펄펄 날았다.
 

KCC는 플레이오프에서만 17경기를 소화했다. 쉽지 않은 일정이었다. 그럼에도, 버틸 수 있었다. 선수층이 두터웠고, 외국 선수의 기복이 없었기에 가능했다. 그 중심에 브랜드가 있었다. 챔프전을 비롯한 플레이오프에서 가장 꾸준했다. 만약 브랜드가 흔들렸거나 주춤했다면, KCC는 우승에 다가서지 못했을 것이다.
 

브랜드는 2008~2009시즌 종료 후 재계약을 했다. 하지만 브랜드는 KBL 2년 차를 맞아 주춤했다. 전반적인 활약이 직전 시즌만 못했다. KCC도 브랜드의 기량 하락에 아쉬움을 안았다. 브랜드의 얼굴도 조금씩 어두워졌다.

서울에서
KCC는 또 한 번 시즌 중 트레이드를 했다. 삼성과 외국선수를 맞바꾸는 트레이드에 합의한 것. 브랜드를 삼성에 보내는 대신, 테렌스 레더를 받기로 했다. 레더는 삼성의 기둥이자, 당시 프로농구를 호령했던 최고의 선수.
 

이로써 KCC는 레더와 아이반 존슨이라는 막강한 외국 선수 듀오를 구축했다. 한편, 삼성은 브랜드를 받아들이면서 개편을 예고했다. 그러나 플레이오프에서 KCC를 넘어서지 못했다.

울산에서 그리고 이후
브랜드는 2009~2010시즌에 부진했으나, 다시 한 번 기회를 잡았다. 울산 모비스(현 울산 현대모비스)가 브랜드를 첫 외국 선수로 낙점했기 때문. 그러나 브랜드는 모비스에서 시즌을 마치지 못했다. 모비스가 시즌 중 그를 교체했다. 이로써 브랜드는 KBL에서의 여정을 마쳤다.
 

두 시즌 이상 활약한 것을 고려하면, 브랜드도 대체 외국 선수로 거론될 만했다. 그러나 외국선수 교체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동안, 브랜드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캐나다에서 선수 생활을 마쳤다. 그 후 미국 여자대학농구 팀의 코치를 거쳐, 감독이라는 직함을 얻었다.

사진 제공 = KBL

 

바스켓코리아 / 이재승 기자 considerate2@basket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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