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력과 국가주의만 앞세운 전시는 이제 그만

노형석 기자 2024. 5. 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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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한국미술전시 결산
아르코특별전 등 관제 전시는 외화내빈
각개 홍보전보다 체계적 기획공간 마련해야
베네치아 팔라초 로레단에서 미국 작고작가 제임스 리바이어스의 작품들과 함께 2인전으로 선보인 원로작가 이승택씨의 작품들. 그의 전시는 이번 베네치아 비엔날레의 한국 관련 전시들 가운데 수준이 가장 높다는 호평을 받았다.

얼추 100억원을 쏟아부었다. 과연 얼마나 성과가 나올까.

최근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유례 없는 거액을 투입하며 펼친 한국 미술전시들의 득실을 놓고 논의가 분분하다. 세계 최대 규모와 최고 권위를 지닌 격년제 국제미술잔치로 지난달 20일 공식개막한 60회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한국 미술계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아르코)와 광주시 등의 정부기관·지자체와 민간 화랑, 작가들이 역대 최대규모인 10여개의 각종 연관 전시회를 펼쳤다. 전에 없던 존재감을 과시한 셈이지만, 투입 대비 결실이나 전시방식, 장소 등의 효율성 등을 놓고 과연 적절했는지에 대한 여러 분석과 의견이 나오고 있다.

베네치아 도심 서북쪽 카날레지오 지구의 빌모트 파운데이션에서 열린 중견작가 이배씨의 개인전 현장. 전시장 바닥과 벽을 화폭으로 삼고 먹붓을 휘둘러 작가의 호흡을 표출한 ‘붓질’ 이미지 작품과 보이지 않게 내부를 파낸 3톤짜리 화강석 조형물이 보인다.

돈 씀씀이는 어마어마했다. 내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 국가관 개설 30돌을 기념해 아르코가 현지 옛수도원 건물에 마련한 역대 한국관 출품작 모음 특별전(9월8일까지)에 세금과 기업후원을 합쳐 약 30억원이 투입됐다. 올해 광주비엔날레 창설 30주년을 맞아 자르디니 국가관 공원 앞 전시장에 마련한 특별전(11월24일까지)에도 광주 비엔날레 개최 비용에 맞먹는 20억원에 이르는 재원이 들어갔다. 갤러리현대, 피케이엠(PKM), 조현 등 민간 화랑들이 자금을 대어 시내 곳곳에 개설한 이승택 작가와 미국작가 2인전, 근대 추상화 대가 유영국·이성자 회고전, 신성희 회고전, 중견 작가 이배 근작전, 하인두·고영훈·박서보·정혜련 전 등도 각 전시당 최소 10억원대부터 많게는 20억~30억원대가 들어갔다는 게 정설이다. 모두 합치면 베네치아의 한국 관련 전시 총 비용은 100억원대 안팎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정부·지자체에서 마련한 기획전은 정치인 기관장만 부각시키는 관제 전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게 미술인들의 한결같은 평가다. 단적인 예가 지난달 18일 저녁 베네치아 옛 몰타기사단 수도원에서 열린 한국 국가관 건립 30주년 특별전 개막식이었다. 출품작을 낸 역대 한국관 전시작가 명단만 호명됐을 뿐 콘텐츠 중심이었던 기획자들은 아예 호명하지도, 소감을 말할 기회도 마련되지 않았다. 대신 전시를 주최한 아르코의 정병국 위원장이 박카스병을 꺼내들고 인사말을 하는 간이 퍼포먼스를 하면서 주인공처럼 부각됐다. 그는 한국관 건립 주역인 거장 백남준이 1990년대 초 건립 사업을 논의하기 위해 청와대에서 김영삼 당시 대통령을 면담한 직후 품에서 박카스 병을 꺼내어 당시 비서관이던 자기 앞에서 마셨던 기억을 이야기했고, 아르코 쪽은 작가와 기획자들의 역대 내력은 젖혀놓고 정 위원장의 발언을 집중적으로 홍보했다.

광주비엔날레도 양상은 다르지 않았다. 지난 18일 오전 베네치아 자르디니 공원 정문 앞 전시장에서 광주 비엔날레 30주년 특별전 개막행사를 마친 뒤, 강기정 광주시장을 비롯한 비엔날레 관계자들은 오찬 장소로 가는 길에 ‘광주… 성공개최로 국제미술도시 도약’이란 펼침막을 꺼내들고 즉석 시가행진을 벌였다. 행렬 앞에는 상쇠 예인이 징을 치며 길잡이를 했다. 남의 나라 미술잔치에 등장해 시위하듯 자기 비엔날레를 알리는 대열에 현지인과 미술인들은 어리둥절해 했으나 관계자들은 행진 도중 멈춰서서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강 시장은 이 행진을 두고 “베니스에 광주 정신을 발산했다”고 자화자찬까지 했다. 두 현장을 지켜본 한 국내 기획자는 “이번 비엔날레는 국내 정치인들이 거칠게 전시판에 들어와 주역처럼 휘젓고 다니며 자기 치적과 홍보의 수단으로 활용한 퇴행의 자리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달 18일 베네치아 시내 옛 몰타기사단 수도원 건물에서 열린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 국가관 건립 30주년 특별전 개막식. 전시를 주최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정병국 위원장이 박카스병을 꺼내들고 인사말을 하는 모습이다.

이에 비해 화랑들이 주도한 전시회는 고풍스러운 현지 공간에 잘 들어맞는 세련된 큐레이션을 선보이며 수준급 대작과 근작들을 속속 내놨고 꼭 봐야 할 주요 전시장으로 꼽히면서 한국미술의 격상된 위상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러나 베네치아의 오래된 저택이나 수도원 건물을 수십억원씩 주고 빌려 경쟁적으로 유명작가의 소개전를 꾸리고, 이배 작가 전시에서 보듯 거대한 돌 조형물을 무게 규정에 맞춰 전시하기 위해 23톤 짜리 돌덩이의 내부를 모두 파내어 3톤으로 줄이는 식의 전시 양태는 다분히 소모적이며 건실한 알리기가 아니라는 비판도 없지 않았다. 기관장 중심의 구태의연한 관제 국가주의 전시 못지않게 좋은 전시 자리를 잡기 위한 화랑들의 물량공세 중심의 전시 알리기 전략 또한 혁신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18일 오전 베네치아 자르디니 공원 정문 앞 전시장에서 광주 비엔날레 30주년 특별전 개막행사를 마친 뒤 강기정 광주시장을 비롯한 광주비엔날레 관계자들은 펼침막을 꺼내들고 즉석 시가행진을 벌였다. 행진 도중 멈춰서서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 노형석 기자

베네치아 현장에서 만난 국내 미술인들은 최근 세계 문화판에서 더욱 공공적인 전시 공연 무대로 주목받는 베네치아의 공간적 가치를 한국도 전략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모적인 각개약진식 전시를 지양하고 국가나 대기업 차원에서 현지에 상당 규모의 아트센터 거점을 만들어 연중 무휴로 미술, 영화, 연극, 춤 등 각 행사에 맞는 프로그램들을 상시 운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삼성 리움이 프랑스의 피노컬렉션이나 페기 구겐하임 베니스처럼 베네치아 분관 형식의 전시센터를 만들어 청년 작가를 선발하는 아트스펙트럼 같은 기획전시를 국제적으로 진행할 수 있지 않겠냐는 의견도 있었다. 실제로 이와 관련해 정병국 아르코 위원장은 한국관 개막 만찬 자리에서 자르디니 공원 입구의 카페 같은 공간을 거점으로 활용할 수 있지 않느냐는 사견을 내놓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베네치아/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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