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미 ‘사이보그’다 [물리학자 김상욱의 ‘격물치지’]

위키백과에 따르면, 사이보그(cyborg)란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와 유기체(organism)의 합성어로 기계와 인간의 결합체인 개조 인간을 의미한다. 영화 〈공각기동대〉 〈터미네이터〉 〈로보캅〉 등의 SF에 등장했던 익숙한 존재다. 우리는 사이보그에 대해 양면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 우선 인간의 몸에 기계가 결합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다. 이는 사이보그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로봇과 인공지능의 급속한 발전을 보면 사이보그야말로 인류의 피할 수 없는 미래라는 생각도 든다. 필자는 이 글에서 우리는 이미 사이보그이며, 단지 그 성능을 높여가는 중이라는 이야기를 하려 한다.
지구에는 수많은 생물이 존재하는데 크게 단세포생물과 다세포생물로 나눌 수 있다. 세균이나 아메바같이 하나의 세포로 된 ‘단세포생물‘은 개체수도 엄청나지만 어디에나 살고 있어 사실상 지구의 진정한 주인이라 해도 무방하다. 수많은 세포가 모여 구성된 ’다세포생물’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대부분의 동물과 식물, 나아가 우리 자신이 포함된다. 다세포생물은 진핵세포로 구성되는데, 진핵세포의 탄생이야말로 생명 진화의 역사에서 가장 놀라운 사건이라 할 만하다.
37억 년 전쯤 지구에 최초의 생명체가 나타난 이래, 이 세상에는 세균만 존재했다. 그러다가 16억 년 전쯤의 어느 날, 세균 하나가 또 다른 세균인 미토콘드리아를 집어삼켰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세균은 미토콘드리아를 소화하지 못하고 소화불량에 걸렸다. 미토콘드리아는 산소와 영양소를 이용하여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세균이다. 참고로 산소는 반응성이 큰 원자로 독성(毒性)이 강하다. 세균은 소화불량에 걸렸지만 미토콘드리아가 독성이 강한 산소를 제거하고 에너지까지 만들어주니 행복했다. 미토콘드리아도 세균의 몸속에서 보호받으며 에너지 생산에만 전념할 수 있어 역시 행복했다. 이 공생(共生)으로 탄생한 것이 진핵세포다.
나는 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세포생물에게도 공생은 보편적 전략이다. 식물은 꽃을 피워 곤충에게 꿀을 제공하고, 곤충은 꽃가루를 전달하여 식물의 번식을 매개한다. 동물은 산소를 들이마셔 영양소와 결합시켜 에너지를 얻고 부산물로 이산화탄소를 버린다. 식물은 이산화탄소를 영양소로 바꾸고 부산물로 산소를 버린다. 인간도 수많은 미생물과 공생하고 있다. 우리는 섭취한 음식물의 상당량을 장내에 존재하는 미생물의 도움으로 분해한다. 최신 연구 결과에 따르면, 내 몸을 이루는 세포 가운데 개수로 43%만이 나의 유전자를 갖는다. 나머지는 공생하는 미생물이다. 즉, 나는 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처럼 모든 동식물은 거대한 공생의 네트워크 속에서 살아간다.
인류 문명은 공생의 역사다. 문명은 농경과 함께 시작되었는데, 농경이란 인간과 식물이 적극적으로 공생관계를 맺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재배에 용이하고 영양가 높은 작물이 공생 파트너로 선택되었다. 유라시아에서는 쌀·밀·콩, 아메리카에서는 고구마·감자·옥수수 같은 것들이다. 농경 초기의 작물을 지금 마트에 진열하면 하나도 팔리지 않을 것이다. 크기도 작고 맛도 형편없기 때문이다. 인류는 수천 년 동안 끊임없는 품종개량을 통해 작물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바꾸었다. 농경은 작물을 변화시켰다.

인간과 작물의 공생이 인간에게만 일방적으로 유리한 거래라고 보이겠지만, 작물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인간이 고된 육체노동을 통해 작물의 경쟁자(잡초)와 천적(해충)을 제거해주고 영양분(비료)과 물을 주고 있지 않은가! 오히려 인간이 작물에게 이용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이런 짓’을 자발적으로 하는 것은 벌이 꿀에 중독되었듯이 작물의 맛에 중독되었기 때문 아닐까. 농경은 인간을 노동하는 노예로 만들었다. 이처럼 공생의 결과 작물과 인간은 서로를 변화시켜 작물-인간 결합체가 되었다.
인간은 식물만이 아니라 동물과도 공생하기 시작했다. 동물은 소·닭·돼지같이 식량으로 쓰이거나, 또는 개나 말과 같이 사냥 보조나 이동수단으로 공생해왔다. 식용 가축은 한때 인간과 함께 살며 서로에게 이로운 공생관계를 맺었겠지만 현대의 사육·도축 공장에 이르러서는 인간이 가축에 기생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생존과 번식이라는 생명 궁극의 목표만 놓고 보면, 식용 가축은 인간의 독점적 먹이가 되는 바람에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개체수를 갖는 성공적(?) 동물이 되었다. 아마도 소·닭·돼지는 이런 해석에 동의하지 않을 것 같지만 말이다.
농경이 신석기시대와 함께 시작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신석기는 구석기와 완전히 다르다. 구석기가 그냥 땅에 떨어져 있던 돌이라면, 신석기는 용도에 맞게 변형된 돌이다. 신석기를 만들려면 우선 자연을 목적에 맞게 변형시켜 사용한다는 개념이 필요하다. 따지고 보면 농경도 이런 개념의 산물이다. 이제 인간은 자신이 만든 인공물과 함께 살게 된 것이다. (대개 죽어 있는) 인공물과의 공존도 넓은 의미의 공생이라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인공물이 인간에게도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신석기 혁명이 인간에게 유익한 것이었는지는 논란이 있다. 농경은 잉여 산물을 제공했지만 이는 사유재산·지배계급·불평등을 낳았고, 피지배계급의 사람들을 고된 노동과 빈곤으로 내몰았다. 이것은 작물이나 가축, 도구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 정치의 문제다.
산업혁명은 인간에게 기계라는 새로운 공생 파트너를 제공했다. 증기기관이나 내연기관 기계는 문명의 모습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 그 자체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증기기관차가 등장하자 사람들은 분 단위의 시간을 따라야 했다. 근대 이전 사람에게 시간은 몇 시간 단위로 구분되었다. 조선시대 왕실에서 사용하던 시간 단위도 대략 2시간이었다. 하지만 기차 출발시간은 분 단위로 주어진다. 이뿐만 아니라 기계와 함께 일하는 노동자도 기계와 같이 움직여야 했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스〉는 이런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다. 이제 인간은 ‘1시간 작업, 10분 휴식’ 같은 체계에 몸을 맞춰야 했다. 분 단위로 시간에 쫓기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전형적인 모습이 탄생한 것이다.
기계와 유기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
현대의 인간은 수많은 기계와 결합한 일종의 사이보그다. 자동차를 생각해보자. 자동차를 운전하는 동안 나는 자동차라는 기계와 결합한 사이보그가 된다. 눈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뇌에서 명령을 내리면 손에 연결된 핸들을 움직여 자동차의 방향을 바꾸고 발을 움직여 속도를 제어한다. 나의 손과 발이 기계의 일부가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하철을 타는 동안 우리는 지하철-인간 사이보그가 되고, 스마트폰을 하는 동안 스마트폰-인간 사이보그가 된다. 사실 안경을 쓰거나 옷을 입고 있거나 날마다 혈압약을 복용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일종의 사이보그가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주장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1985년 도나 해러웨이는 〈사이보그 선언문〉에서 “우리 모두는 기계와 유기체의 잡종으로 이론화되고 제작된 키메라다. 한마디로 우리는 사이보그다”라고 주장했다. 기계와 유기체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으며 기계/유기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 인간을 총체적으로, 즉 사이보그로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해러웨이는 나아가 육체/정신, 동물/인간, 문명/원시, 특히 남/여와 같은 이분법적 개념도 경계를 부수고 총체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식물과 동물의 공생에서와 달리 기계와의 공생에서 인간은 일방적으로 이익만 얻고 있을까? 그렇다면 공생이라고 부르는 것이 부적절할 수도 있다. 자동차는 우리에게 편리를 제공하지만, 우리가 자동차에게 제공하는 것은 그들의 생존뿐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자동차라는 기계의 생존을 위해 우리는 막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동차 소음에 시달리고 유해한 배기가스를 흡입해야 한다. 도시는 위험한 자동차도로로 촘촘히 분할되었고, 많은 사람이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나아가 배기가스의 이산화탄소는 기후위기의 주범이다. 자동차-인간 사이보그는 서로 이익을 주는 한편, 서로에게 희생을 요구한다. 더구나 우리는 자동차와 분리될 수 없다. 아니, 현대의 인간은 자동차 없이 살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동차 배기가스를 통제하고 소음을 규제하고 도로교통법과 자동차보험을 만들고 교통사고 긴급의료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지구의 생물은 공생을 통해 다세포생물로 진화할 수 있었다. 이제 대부분의 생명체는 공생의 네트워크 속에서 살아간다. 인간도 식물, 동물과 공생을 해왔으며 나아가 자신이 만든 인공물, 즉 도구나 기계와도 공생을 하고 있다. 산업혁명은 기계의 능력을 극적으로 향상시켰으며 이제 우리는 기계 없이 살 수 없을 정도로 기계와 밀착되어 있다. 옷, 안경, 전등, 혈압약, 자동차, 상하수도, 스마트폰과 분리되어 살 수 있을까? 넓은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기계와 한 몸을 이룬 사이보그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로봇과 인공지능 같은 신기술은 어떤 식으로든 인간과 결합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 기술은 단지 사이보그의 성능을 높이는 것에 불과하니까.
이것을 기계와의 공생이라고 부를지, 사이보그라고 부를지는 중요하지 않다. 진짜 중요한 일은 기계-인간 사이보그가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이것은 기술의 문제라기보다 인간의 문제, 정치의 문제다.
김상욱 (경희대 물리학과 교수)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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