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인권조례가 없으면 학생 인권이 추락할까 [김유나의 풀어쓰는 교육 키워드]
학생인권조례는 머리·복장 자율화, 체벌금지 등 학생의 권리를 명시한 것으로 2010년 경기도에서 처음 시행됐습니다. 이후 광주, 전북, 제주, 인천 등 17개 시·도 중 충남·서울을 포함해 7곳에서 운영됐습니다. 학생의 인권 수호에 진보·보수가 어디 있겠냐만, 진보 교육감의 상징이 되면서 주로 진보 성향 교육감이 있던 곳에서 만들어졌습니다. 도입 당시 각 지역에서 진통을 겪었으나 최근에는 개정·폐지를 둘러싼 논란이 뜨겁습니다.
개정·폐지 이야기가 본격화된 것은 지난해입니다. 지난해 7월 서울 서초구 서이초에서 20대 교사가 숨진 채 발견된 뒤 사회적으로 교권침해가 이슈로 떠올랐습니다. 숨진 교사가 평소 학부모의 민원 등으로 괴로워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교직 사회가 끓어올랐고, 교육 당국은 부랴부랴 교권침해에 대한 대책 만들기에 나섰습니다.
대책 중 하나로 거론된 것은 학생인권조례 개정이었습니다. 교육부는 학생인권조례가 ‘과도하게 학생의 권리만 강조’해 학생들의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며 학생의 책임과 교사의 권리 관련 내용도 넣어 개정하도록 교육청을 독려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학교는 학생과 교사의 권리가 동등하게 존중받아야 할 곳임에도 조례 존재 자체가 학생들에게 ‘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학생 인권’이란 인식을 갖게 한다는 설명이었습니다.
조례가 있는 지역의 교육감들도 이런 문제의식 자체에는 동감했습니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을 비롯한 진보 성향 교육감들은 조례를 개정하겠다며 한발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일부 시·도에서 개정이 아닌 폐지안을 들고나오면서 갈등이 생겼습니다. 폐지안이 통과되자 교육청에서 72시간 동안 천막 농성을 벌인 조 교육감은 조례를 되살리기 위해 법적 싸움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어서 한동안 갈등은 계속될 전망입니다.
학생의 인권은 당연히 보장되어야 할 소중한 가치입니다. 그러나 조례 폐지가 곧 ’학생 인권 추락’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폐지에 반대하는 측은 ‘조례가 교권침해의 원인이란 근거가 없다’며 반발하고 있습니다. 조례가 교권침해를 불렀다면 조례가 없는 지역보다 조례가 있는 지역에서 교권침해 건수가 많아야 하는데, 통계상으론 유의미한 차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학생인권조례와 교권에 별다른 상관관계가 없다는 주장은 일견 타당합니다. 다만 여기서 생각해볼 지점은, ‘조례와 학생 인권 사이엔 상관관계가 있는지’입니다. 조례가 폐지되면 학생 인권이 보호받지 못한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조례가 있는 지역과 없는 지역의 학생 인권 보장 정도에 차이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교권과 마찬가지로 학생 인권 역시 지역에 따라 눈에 보이는 차이는 없습니다. 즉, 실제 학생 인권 보장 정도와 조례 유무는 사실상 큰 상관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폐지 반대 측은 “정확한 근거 없이 폐지했다”고 비판하지만, 조례가 학생 인권을 위해 유지되어야 할 근거도 보이지 않습니다.
지난해 말 서울시의회가 조례 폐지 시도에 나서자 조 교육감 등 9개 시·도교육청 교육감은 이를 비판하는 공동 입장문을 내고 대응했습니다. 최교진 세종시교육감은 조 교육감과의 공동 기자회견에 참석해 “조례 폐지는 학생 인권의 후퇴이자 민주주의의 퇴보”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최 교육감이 있는 세종시엔 학생인권조례가 없습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조례가 없는 세종시는 학생 인권이 보장받지 못하는 퇴보한 지역이겠죠. 세종에서 자녀를 키우는 학부모로서, 최 교육감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지금 세종의 학생 인권은 땅에 떨어졌다고 보고 있는 걸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최 교육감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 같습니다.
서울 학생인권조례의 주요 내용은 △차별받지 않을 권리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사생활의 자유 △양심·종교의 자유 등입니다. 이는 헌법 등에서 보장하는 기본권이기도 합니다. 조례가 없다고 해서 저런 권리들이 학생에게서 사라진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학생인권조례는 상징적인 의미가 큽니다. 구태여 없애려는 것도, 지키려는 것도 모두 이념 싸움으로 보이는 이유입니다. 조례가 폐지되면 학생들에게 큰일이 날 것이라 하는 것도, 조례가 있어서 교권이 침해된다는 것도 모두 공포 마케팅과 다를 바 없습니다. 특히 조례를 지키겠다고 교육감이 농성까지 하는 것은 정치적 의도로밖에 해석이 되지 않습니다. 조 교육감의 농성장에는 사흘간 많은 정치인과 이전 정부 교육부 장관 등이 찾았습니다. 진보 정치인, 진보계 교육인이라면 꼭 들러야 하는 코스가 된 모습이었습니다.
인권은 진보 교육계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조 교육감은 조례 수호보다는 실질적으로 학교에서 학생과 교사가 함께 존중받으며 생활할 수 있는 대책 마련에 좀 더 힘써야 할 때가 아닐까요. 서이초 사건이 발생했을 때 조희연 교육감은 유족을 자처했습니다. 당시 교권침해 문제를 방치한 비난의 화살은 교육부에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교사를 지키지 못한 당사자는 교육부가 아닌 서울시교육청이고, 일차적인 책임도 서울시교육청에 있습니다. 결국 학생인권조례 폐지 논란도 서울시교육청이 촉발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서울시교육청은 피해자 쪽에서 슬퍼하기보다 왜 교사를 지키지 못했는지 반성하고 사죄했어야 합니다.
지금 학생이나 교사에게 중요한 것은 조례 유무가 아닙니다. 현장에 닿지 않는 조례로 싸우기보다, 교육계에서 좀 더 건설적인 논의가 이뤄지기를 바랍니다. 말만 요란하게 하는 것은 정치적인 퍼포먼스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조례는 진보 교육감의 훈장이 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교육계는 애초에 조례가 왜 생겼는지, 조례가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부터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김유나 기자 yo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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