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양란의 좌충우돌 해외여행 18] 모스크바 ‘카페 푸시킨’에서 점심 식사
[시조시인·여행작가 신양란] 사람들은 러시아를 여행할 때 무슨 문제로 불편함을 느낄까?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나는 러시아에서 사용하는 키릴문자 앞에서 완벽한 까막눈 신세라 괴롭기 그지없다.
키릴문자는 ‘라틴 알파벳’을 가지고 러시아로 가던 중에 배가 흔들리는 바람에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라틴 알파벳에서 유래되었으나 형태가 너무나도 달라진 까닭이다.
이방인은 생전 처음 보는 이상한 글자 형태 때문에 키릴문자가 어렵게 여겨지지만, 사실은 눈에 익은 알파벳이 사람을 더욱 골탕 먹인다. 영어식 소릿값[音價]에 익숙한 우리는 같은 글자가 전혀 엉뚱한 소리를 낼 때 더욱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H’는 영어의 ‘n’에 해당하는 소릿값을 갖고, ‘P’는 ‘r’의 소릿값을, ‘C’는 ‘s’의 소릿값을 갖는다. 그래서 영어의 ‘restaurant’은 러시아 키릴문자로 ‘ресторан’이라고 적으니, 아무리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읽는다 해도 한눈에 단어가 들어오지 않는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상트페테르부르크나 모스크바에서 원하는 곳을 찾아다니는 게 어려웠다. 다른 데처럼 여행자를 위해 표지판이나 간판에 키릴문자와 영어를 병기해 주면 좋을 텐데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오로지 키릴문자만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한 번은 모스크바의 품격 있는 레스토랑에서 가성비 점심식사를 한 적이 있는데, 사실 현지인이 아니면 알기 어려운 고급 정보에 해당하겠다. 키릴문자 까막눈인 내가 그런 행운을 잡은 데에는 이런 사연이 있다.
2017년에 수원 일월도서관에서 여행 인문학 강의를 할 때 일이다. 젊은 엄마 셋이 유럽 여행에 대해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여 식사 자리를 갖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들도 7월 말에 모스크바에 있을 예정이라는데, 그중 한 사람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유학했고, 모스크바에서 직장 생활을 했다지 않는가?
나는 그때 <가고 싶다, 모스크바>를 쓰기로 출판사와 계약을 한 상태라 러시아와 모스크바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많았다. 정말 운 좋게도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난 격이다. 그래서 모스크바에 가면 연락해서 만나자고 단단히 약속했다.
약속대로 우리는 모스크바에서 만났다. 붉은 광장에 있는 카잔 대성당 앞에서 만나 차를 마시며 모스크바 여행에 대해 여러 가지 조언을 들었다. 바로 그때 ‘카페 푸시킨’이란 식당의 점심 메뉴가 저렴하면서도 품격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만 영어가 안 통하므로 불편할 수는 있겠지만, 한번 가볼 만하다고 추천했다.
우리 부부로서는 사실 그런 식당은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영어가 통해도 답답할 판에, 러시아어만 통하는 식당에 가서 무슨 수로 식사를 한단 말인가. 주문도 못하고 버벅댈 게 뻔하니.
그런데 남편이 웬일로 “안 그래도 식사를 대접하고 싶었는데, 같이 가자”고 말하는 게 아닌가. 그렇게 카페 푸시킨에 가보니 정말 멋진 식당이었다.
러시아 정통 요리를 내놓는 고급 식당이라 저녁에는 값이 호되게 비싼 곳인데, 점심에는 비즈니스 런치라고 하여 저렴하게 식사를 제공했다. 식당 건물이며 실내 인테리어, 종업원들의 세련된 매너, 음식의 수준 등이 다 빼어났다.
매우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친 후 계산서를 받아보니, 어른 넷에 아이 둘이 먹은 음식값이 2400루블(3만5664원)이었다. 당시 환율로는 5만원 남짓이었으니 러시아 정통 코스 요리를 즐긴 대가치고는 행운에 가까운 가격이었다.
벌써 여러 해 전의 일이라 지금도 같은 메뉴를 내놓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혹시 모스크바에 갈 계획이 있는 사람은 한번 도전해 보라고 권하고 싶어 이 글을 쓴다.
|신양란. 여행작가, 시조시인. 하고 싶은 일, 즐겁고 행복한 일만 하면서 살고 있다. 저서로 <여행자의 성당 공부><꽃샘바람 부는 지옥><가고 싶다, 바르셀로나><이야기 따라 로마 여행>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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