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 보기를 금같이 하라 [최준영의 경제 바로읽기]
구리 둘러싼 글로벌 기업들의 경쟁 본격화
(시사저널=최준영 법무법인 율촌 전문위원)
올림픽에서 메달의 순서는 금, 은, 동이다. 금이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선호되었기 때문이다. 3위에 해당하는 동은 구리를 의미한다. 구리는 인류에게 금속 문명을 시작하게 만들었다. 구리는 산이나 염기성에 대한 내성이 상당히 높으며, 무엇보다도 모든 금속 가운데 전기 전도성이 은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금속이다.
구리의 이러한 특성은 20세기에 본격적인 전기 문명이 대두하면서 크게 부각되었다. 전기를 다른 곳으로 보내기 위한 전선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구리는 중요한 광물로 변신했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보편화된 현재에도 구리는 매우 중요하다. 과거 컴퓨터의 CPU 속도는 MHz 단위에 머물렀는데, 최근에는 GHz 단위로 1000배 이상 향상되었다. 여러 가지 요인 가운데 하나는 CPU 내부 배선을 기존 알루미늄에서 구리로 바꾼 것이다.
구리는 미래의 핵심자원
인류는 1만 년 전부터 구리를 사용했다. 광석을 채굴해 제련한 구리의 95% 이상은 1900년대 이후 채굴한 것이다. 지구 전체적으로 구리 매장량 자체는 많지만 경제성 있게 이용할 수 있는 구리의 양은 제한돼 있다. 현재 속도로 구리 원광을 채굴한다면 남은 가채연수는 25~60년밖에 안 된다는 추정도 있다.
물론 구리는 아무리 재활용해도 그 품질이 낮아지지 않는 특성이 있어 재활용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덕분에 당장 구리의 부족 문제가 부각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기후변화에 따른 탈탄소 움직임이 본격화하면서 구리 수요는 급속히 확대되고 있다. 탈탄소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해법 또한 전기화이기 때문이다. 전기화는 필연적으로 대규모 구리를 필요로 한다. 태양광, 풍력 등 다양한 곳에서 발전이 이뤄지면서 이를 기존 전력망과 연결하기 위한 전선 수요가 대폭 확대되고 있다. 전기차에도 대량의 구리가 포함되기 때문에 미래에도 구리 수요는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다.
구리 가격은 2023년 3월 톤당 1만730달러를 기록하면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후 가격 급등에 따른 부담감과 투기 세력의 차익 실현이 겹치면서 하락했지만 최근 다시 상승하고 있다. 4월초까지 톤당 8000달러 후반대를 기록하던 구리 가격은 4월30일 9973달러를 기록하면서 급등했다. 미국의 씨티은행은 '구리 수요가 2030년이 되면 현재보다 420만 톤 증가할 것이며, 2025년이 되면 구리 가격은 톤당 1만 달러를 넘어설 것'이라고 예측했다. 올해 초 신용평가사 피치의 시장조사기관인 BMI는 친환경에너지 전환에 따른 구리 수요 증가로 인해 '2025년까지 구리 가격은 75% 이상 급등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반적으로 구리 가격의 지속적 상승 가능성은 매우 높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구리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소수의 국가에 매장량 대부분이 집중돼 있다는 점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구리 매장량을 보유한 국가는 칠레다. 칠레는 약 1억9000만 톤의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다. 그다음으로는 페루, 호주, 콩고민주공화국, 러시아 등 순이다. 다른 광물자원과 마찬가지로 구리 역시 소수의 기업이 대규모 광산을 보유하고 있다. 칠레의 코델코가 최대 구리 생산량을 기록하고 있다. 다국적 광물 기업인 호주의 BHP, 스위스의 글렌코어 등도 대표적 구리 광산을 보유하고 있다.
최근 BHP가 경쟁업체인 앵글로 아메리칸을 311억 파운드(약 53조4000억원)에 인수하겠다고 발표하면서 광물 기업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 BHP는 2001년 호주의 BHP와 영국의 빌리턴이 합병해 탄생한 기업으로 시가총액이 203조원에 이르는 대규모 광산 기업이다. BHP가 기존 주가보다 14% 이상 높은 가격으로 앵글로 아메리칸을 인수하겠다고 나선 이유는 구리 생산량을 늘리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남미에 대규모 구리 광산을 보유하고 있는 앵글로 아메리칸을 인수하면 구리 시장 지배력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2023년 5월 호주 광산 업체인 오즈 메네라를 인수했던 BHP는 현재 연간 120만 톤의 구리를 생산하고 있는데 83만톤 규모의 앵글로 아메리칸을 인수하면 생산 규모가 200만 톤에 이르러 세계시장의 10% 이상을 차지하게 된다.
다시 주목받는 글로벌 광물 기업들
BHP의 인수합병 제안에 대해 앵글로 아메리칸 이사회는 4월26일 이를 거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BHP의 제안 가격이 앵글로 아메리칸의 시장가치인 426억 달러(약 58조6000억원)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또한 인수합병 조건으로 제시했던, 앵글로 아메리칸이 보유하고 있는 남아프리카의 철광석과 백금 사업장 매각 역시 받아들이기 곤란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앵글로 아메리칸의 최대주주는 전체 주식의 8.3%를 소유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공공투자기금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입장에서 해외 기업에 매각한다는 것이 내키지 않은 것도 이사회의 인수 거부에 일조했다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
BHP의 인수합병 시도는 실패했지만 이러한 대규모 인수합병 움직임은 계속될 것이다. 지속적인 수요 확대가 예상되지만 신규 광산을 개발하기에는 아직 가격 수준이 낮은 탓에 기존 광산을 인수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2008년 이후 10여 년간의 불황을 거치면서 생존한 기업들이 최근 몇 년간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대량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는 것도 향후 인수합병 시도가 이어질 것으로 예측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실제로 BHP의 제안이 거부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이후 리오틴토, 글렌코어 등 BHP 경쟁사들은 더 높은 가격으로 앵글로 아메리칸을 인수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여기에 더해 중국의 국영기업들도 추가적인 광물 기업 인수를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구리 광산을 보유한 기업들의 몸값은 당분간 계속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구리 광산을 보유한 대규모 광물 기업의 인수합병이 생각보다 잘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라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소수의 기업이 과도한 시장 지배력을 확보하는 것에 대한 국가들의 반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당장 세계 구리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소비하는 중국이 대규모 인수합병에 반대할 수 있다. 중국 이외에 미국도 구리를 국가 전략광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에 인수합병 과정에서 반독점 이슈가 제기될 가능성은 매우 높다.
우리나라의 경우 연간 100만 톤 규모의 구리를 수입하고 있다. 안정적인 수급을 위한 해외 광산 확보 등 투자 확대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지만 과거 파나마 코브레파나마 구리 광산 투자가 우여곡절 끝에 파나마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폐쇄 결정이 내려지는 등 사업 리스크가 크기 때문에 정치적 부담을 안고 무작정 국가 차원의 투자를 늘리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미래의 핵심자원인 구리를 어떻게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느냐에 대한 국가와 기업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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