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은척양조장 대표 "시아버지의 '나눔 전통', 손자와 함께 실천"
학생 자녀 둔 직원에게 매월 장학금 10만~30만 원 지급
동남아 오지 마을 7곳에 교회 겸 공부방, 예식장 건립
"시아버지께 물려받은 가장 소중한 ‘유산’을 손자에게 물려주는 거죠."
돈이 아니다. 건물도 아니다. 경북 상주시 은척면에 거주하는 임주원(63) 은척양조장 대표가 손자에게 물려준 것은 '베푸는 마음'이다. 그는 2023년 12월에 손자 이갈렙(6) 군을 경북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으로 가입시켰다. 본인은 이미 2017년에 아너소사이어티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대구 경북에서 할머니와 손자가 나란히 통 큰 기부자의 반열에 오른 첫 사례다. 경북아너소사이어티 회원 대표와 상주시 나눔봉사단장을 맡고 있는 임 대표는 아너소사이어티에 가입하기 훨씬 전부터 학생, 장애인들을 위해 다양한 기부와 봉사활동을 펼치며 나눔 문화 확산에 헌신하고 있다.
시아버지가 30년 운영하던 ‘학교’를 그만둔 사연
임 대표의 롤 모델은 상주에서 사업가와 독지가로 유명했던 이동영 선생이다. 임 대표의 시아버지다. 1994년 작고하시기 전까지 일평생 베풀면서 살았다. 자신의 땅에 장터를 열기도 했고, 해방 후에는 양잠업 진흥을 위한 뽕나무 묘목 보급 사업 등을 활발하게 펼쳤다. 사회적으로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역임하고 고등공민학교를 설립했다. 고등공민학교는 초등학교나 공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이들에게 중학교 과정을 가르치던 학교였다. 1985년 임 대표가 시집오기 몇 해 전, 시에서 운영하던 공민학교를 사립학교로 전환하라고 권고했지만 고심 끝에 포기했다. 시아버지는 어느 날 며느리를 앉혀놓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자식들을 아무리 봐도 학교를 물려받아 운영할 인재가 없어서 사립학교로 전환하라는 걸 포기했는데, 네가 나타날 줄 알았으면 그냥 할 걸 그랬다."
임 대표는 시아버지가 학교에 얼마나 큰 애정을 가지고 있었는지 설명하면서 인사에 관한 일화를 끄집어냈다. 시아버지는 평소 "늘 인사를 잘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동네 어르신들은 물론 학생들에게도 먼저 인사를 했다고 한다. 겸손한 성정에서 나온 태도였겠지만 그만큼 제자들을 아꼈다. 임 대표는 "30년 가까이 운영하던 학교를 놓으실 때 얼마나 섭섭하고 아쉬우셨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짠하다"고 말했다.
공장 방문한 일본인 부부 "사케보다 맛있다"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양조장을 접으려고 마음먹었다. 술을 만들어 판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술 공장’보다는 다른 사업을 해야겠다는 마음이었다. 양조장을 1억 원에 내놓았다. 얼마 안 가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거래가 흔쾌히 성사될 분위기였으나 사겠다는 사람이 "500만 원만 깎아달라"고 고집을 부렸다. 거래가 평행선을 달렸다.
그즈음 집에 손님이 찾아왔다. 은척면의 버섯 농가를 돌아보고 있던 대학교수 한 명이 "이 동네에 예쁜 집이 하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구경차 들렀던 것이다. 교수는 막걸리를 만드는 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막걸리는 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도 물이 안 좋으면 맛을 낼 수 없다"면서 "이 동네 물이 내가 발견한 가장 좋은 물"이라고 말했다. 임 대표가 "술을 만들어 팔기 싫어서 공장을 내놓았다"고 하자 그는 "막걸리는 술이 아니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전통음식이라고 하더군요. 막걸리의 발효균이 사람에게 얼마나 유익한지 정말 실감 나는 강의를 들었죠. 미생물학과 교수님이었거든요. 그 교수님의 특강 덕분에 양조장을 처분하겠단 결심을 접었어요."
그렇다고 시아버지가 하던 대로 하긴 싫었다. 시아버지가 만들었던 막걸리는 먹고 나면 트림이 나오고 머리가 아팠다. 새로운 막걸리 개발에 뛰어들었다. 우선 도수를 5%로 낮추었다. 쌀의 장점과 밀가루의 장점을 잘 살린 막걸리를 만들겠다고 마음먹었다. 개발에 착수한 지 2년 만에 원하던 막걸리를 얻었다. 한마디로 맛도 좋고 뒤끝도 없는 막걸리였다.
임 대표의 막걸리는 2007년 생막걸리로는 대구 경북에서 처음으로 대형마트에 납품했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주최하고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가 주관한 '2016년 대한민국 우리술 품평회' 생막걸리 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얼마 전 특별한 경험을 했다. 한 일본인 부부가 소문을 듣고 찾아와서는 막걸리를 맛보고 "사케보다 맛있다"고 평가한 후 일본으로 돌아가 고급 과자를 택배로 보내왔다. 마음의 선물이었다.
임 대표는 "양조장을 살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지금 생각해도 그 미생물학과 교수님이 너무 고맙다"고 말했다.
2005년부터 장학사업 꾸준히 실천
나눔의 정신이란 전통도 양조장만큼이나 알뜰살뜰 이어가고 있다. 장애인 단체, 연탄은행 기부를 비롯해 심지어 교도소 재소자들에게도 일정하게 ‘용돈’을 보내는 선행을 베풀었다.
나눔 중에는 장학사업의 비중이 가장 크다. 2005년부터 장학사업을 시작했다. 상주시장학회에 꾸준히 기부하면서 관내 중고등학교에 돌아가면서 골든벨 행사를 열어주고 있다. 그의 장학사업은 국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동남아 오지를 방문해 건물을 지어주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교회와 예식장, 공부방을 겸할 수 있도록 그 마을에서 가장 크고 좋은 건물을 지어주는 일이다. 필리핀에 6채, 미얀마에 1채를 지어 올렸다. 건물 3채를 더 짓는 것이 목표다.
직원 자녀들에게도 장학금을 지급해왔다. 초등학생 자녀에게 10만 원, 중학생은 20만 원, 고등학생은 30만 원씩 매월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현재 직원은 11명. 1년에 3,000만 원이 넘는 직원 자녀 장학금이 나간다.
"아버님이 학교 문을 닫은 걸 그렇게 아쉬워하셨는데, 지금 우리 모습을 보면 아쉬운 마음을 다 씻으실 것 같습니다. 그 학교 자리에 교회, 지역 청년들을 위한 족구장, 쉼터, 직원들 사택을 지었고, 거기다 그 누구보다 열심히 장학사업을 펼치고 있으니 말입니다. 당신의 교육자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칭찬해주실 것 같네요."
임 대표는 "우리 갈렙이 내년에 초등학교에 들어가는데, 증조할아버지의 삶과 정신을 그대로 빼닮은 훌륭한 사회인으로 성장했으면 한다"는 소망을 밝혔다.
김광원 기자 jang750107@hankookilbo.com
Copyright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1.8㎏ 둘째 낳고 떠난 아내… 남편도 의사도 함께 울었다 | 한국일보
- 대통령실 "채 상병 특검은 직무유기" 맹공… 이태원법과 다른 대응 왜? | 한국일보
- 이원석 검찰총장 "디올백 사건 전담팀 구성·신속 수사" 지시 | 한국일보
- "여자와 남자를 옷과 놀이로 구별하지 말아주세요" 어린이를 해방하라 | 한국일보
- 2세 아들 앞에서 살해된 엄마, 25년째 범인 쫓는 아빠 | 한국일보
- "30억도 우습죠"... 불법 돈세탁 먹잇감 된 '테더코인' | 한국일보
- '비계 삼겹살'에 제주지사 "식문화 차이"… 누리꾼 "비계만 먹는 문화라니" | 한국일보
- 세계 놀라게 한 바르셀로나의 신데렐라, 한국선 ‘갑순이 만세’ | 한국일보
- "헛똑똑이 강남 좌파? 유전학적으로 너무 자연스럽다" | 한국일보
- "부산 여행 간 19세 딸 식물인간 됐는데"… 폭행男 '징역 6년' | 한국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