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심사평도 표절... 무료 학술지가 질 나쁜 논문 늘렸다”

이정아 기자 2024. 5. 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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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대학교수, 과학논문 50편의 심사평 분석
논문 심사평 표절율 44~100%까지 나와
심사자들이 과학논문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다른 논문에 달린 심사평을 그대로 베끼는 일이 증가한 것으로 밝혀졌다. 전문가들은 질 낮은 논문이 대량 생산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픽사베이

과학 논문을 학술지에 실으려면 같은 분야에 있는 동료 연구자들로부터 심사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이 ‘피어 리뷰(peer review, 동료 평가)’ 과정에서 심사자들이 논문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다른 논문에 달린 심사평을 그대로 베끼는 일이 증가한 것으로 밝혀졌다. 전문가들은 심사 과정부터 문제가 생기면 질 낮은 논문이 대량 생산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국제 학술지 네이처는 지난 1일(현지 시각) 미코와이 피녜프스키(Mikołaj Piniewski) 폴란드 바르샤바생명과학대 교수 연구진이 최근 학계에 보고된 논문들의 심사평을 검토한 결과 이 같은 사실을 알아냈다고 밝혔다. 피녜프스키 교수의 연구 결과는 지난 2월 국제 학술지 ’과학계량학(Scientometrics)’에 발표됐다.

네이처 보도에 따르면 피녜프스키 교수는 지난해 5월 자신이 환경과학저널에 제출한 논문에 대한 심사평을 읽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심사평 3개 중 2개는 설명이 모호하고 내용이 부족했다. 그는 해당 심사자들이 사용한 특정 문구와 인용문을 구글에 검색한 결과 MDPI, 플로스(PLOS) 같은 여러 오픈 액세스(Open Access) 저널에 똑같은 문구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오픈 액세스 저널은 이용료나 저작권 없이 누구나 인터넷에 접속해 논문을 제한 없이 볼 수 있다. 논문 심사 과정이 단순하거나 느슨해 다른 학술지에 비해 논문 게재가 비교적 쉽다. 이 때문에 질 낮은 논문을 대량 생산하고 있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피녜프스키 교수는 몇 달 전에 제출했던 또 다른 논문에 대한 심사평을 구글로 검색한 결과, 역시 동일한 문구가 이전 심사평에 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후 연구진은 학술지 19종에 제출한 논문 50편에 대한 심사평에서 다른 논문 심사평과 동일한 문구들을 찾아냈다.

연구진이 가장 의심스러운 심사평 5건을 온라인 표절 탐지 도구 사이트(Dupli Checker)에 올렸더니 인터넷에 있는 다른 심사평과 44~100% 같다고 나왔다. 이 사이트를 통해 어느 논문에 실린 심사평을 표절한 것인지 인터넷 주소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연구진이 심사평에 나오는 문장들을 1~3개씩 나눠 구글에 검색한 결과, 2021~2023년에 출판된 심사평 22건에 같은 문장이 나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연구진은 심사평에서 작은 따옴표나 대문자가 잘못 끼어든 부분도 구글에서 검색했다. 그 결과 오류가 난 부분 역시 이전 심사평 50건에 실렸던 것으로 나타났다. 심사평을 베끼면서 오류까지 옮긴 것이다.

표절된 심사평은 대부분 MDPI와 플로스, 엘스비어(Elsevier) 같은 오픈 액세스 저널에 실렸다. 특히 2021~2023년에 심사평 표전 사례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심사자들이 다른 심사평을 베낀 것은 시간이 부족했거나 영어에 능통하지 않은 탓일 수도 있지만, 질 낮은 논문을 빠른 시일 내 학술지에 게재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도로시 비숍(Dorothy Bishop) 영국 옥스퍼드대 실험심리학과 교수는 네이처에 “논문 게재를 승인하는 학술지의 편집자도 이런 일에 관여했을 것”이라며 “심사평을 표절한 논문을 통과시킨 사례가 많은 편집자들을 추가로 연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피녜프스키 교수 연구진은 최근 생성형 인공지능(AI)이 등장하면서 심사평 표절이 더 쉬워졌다고 우려했다. 지난 3월에는 미국 스탠퍼드대 연구진이 논문 심사평에서 AI 특유의 문장 구조와 특정 형용사를 발견했다는 연구 결과를 논문 사전 공개사이트인 아카이브에 발표하기도 했다.

국내 연구자들은 논문 심사평에도 표절 문제가 있을 줄은 몰랐다는 반응을 보였다. 신원선 한양대 식품영양학과 교수는 “비영어권 연구자라면 영어로 심사평을 쓰기 어려워 본인이 이전에 받았던 다른 이의 심사평을 참조하는 일이 종종 있다”며 “그럼에도 문장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썼다는 것은 연구자로서 양심의 문제”라고 비판했다. 신 교수는 “대학원에서부터 연구자들이 다른 연구자의 논문을 검토, 평가하는 방법을 교육시킨다면 이런 문제가 줄어들 것”라는 의견을 냈다.

이창열 연세대 지구시스템과학과 교수는 “어떤 연구자가 어떻게 심사평을 했는지 대부분 비공개이기 때문에 일부 양심 없는 연구자들이 심사평을 베끼는 것 같다”며 “유럽지구과학회가 발간하는 ‘솔리드 어스(Solid Earth)처럼 각 논문에 심사평을 쓴 사람과 내용을 모두 공개한다면 심사자가 특정 연구자의 논문을 근거 없이 혹평하거나, 또는 친분 때문에 과도하게 호평을 하는 일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MDPI와 플로스, 엘스비어 같은 오픈 액세스 저널은 이 문제를 인지하고 자체적으로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베다니 베이커(Bethany Baker) 플로스 미디어 관리 매니저는 네이처에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엘스비어 대변인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했으며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MDPI 연구무결성및출판윤리팀도 성명을 통해 “심사평 표절에 대해 인지했으며 이를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유럽지구과학회가 발간하는 솔리드어스(Solid Earth)는 각 논문에 심사평을 쓴 사람과 내용을 모두 공개하고 있다. 이처럼 저널이 투명하게 공개한다면 심사평 표절을 방지할 수 있다./솔리드어스 스크린샷

참고 자료

Nature(2024), DOI: https://doi.org/10.1038/d41586-024-01312-0

Scientometrics(2024), DOI: https://doi.org/10.1007/s11192-024-04960-1

arXiv(2024), DOI: https://doi.org/10.48550/arXiv.2403.07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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