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심포니에 굶주린 음악팬의 갈증 해소한 冷水’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2024. 5. 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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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라이브러리 속의 모던 경성]NHK심포니 전신’新響', 하얼빈 교향악단, 1939년 부민관서 잇달아 연주
일본 NHK 심포니 전신인 신교향악단(신향) 상임지휘자 요셉 로젠슈톡. 1940년 신향을 이끌고 온 그는 경성 부민관에서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을 지휘했다. 서른 직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바그너 오페라를 지휘한 로젠슈톡은 당대 유명 지휘자였다. /Public Domain

‘동경서 ‘신향(新響)’ 경성 내연(來演)’

1939년 5월 각 신문에 ‘신향’이 내한공연을 갖는다는 보도가 났다. 다음달인 6월10일과 11일 경성 부민관에서 일본 제1의 오케스트라인 ‘신향’이 연주회를 연다는 소식이었다. 1945년 광복을 맞기 전까지 조선에는 제대로 골격을 갖춘 전문 교향악단이 없었다. 경성제대나 연희전문 오케스트라같은 아마추어 연주단체나 경성방송관현악단처럼 20명 안팎의 챔버 오케스트라가 전부였다.

1939년 3월 경성을 찾은 하얼빈 교향악단은 본격적 전문 오케스트라로선 처음으로 베토벤 교향곡(5번 ‘운명’)과 글린카, 무소륵스키 등 러시아 작품을 연주했다. 그런데 불과 석달 만에 라디오 중계로만 듣던 신향이 처음 부민관 무대에 선다는 뉴스였다.

◇일본 순회 연주 이어 경성 무대에

1926년 창설된 ’신향’은 ‘신교향악단’ 준말로 현 NHK심포니 오케스트라 전신이다. 1936년 폴란드계 유태인 지휘자 요셉 로젠슈톡(Joseph Rosenstock)을 상임지휘자로 맞이하면서 아시아 정상급 오케스트라로 떠올랐다.

‘동경의 신교향악단은 ‘요젭 로-젠슈톡’씨를 지휘자로 하여 이미 커다란 족적을 남기고 있거니와 금춘에 이미 제200회 기념공연을 일비곡(日比谷·히비야)공회당에서 열기로 되었는데 최근 조선으로부터 이 악단을 부르게 되어 오는 6월10일,11일의 2일간 경성에서 연주회를 열기로 결정되었다.’(조선일보 1939년5월12일)

신문은 ‘이 악단은 대판(大阪·오사카) 공연을 마치고서 그 길로 서울로 일행 60명이 건너올 터로 지휘자,곡목 등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으나 로젠슈톡씨는 아마 건너오지 못할 모양’이라고 전했다.

일본 제1의 오케스트라 신향이 1939년 6월10일~11일 경성 연주를 갖는다고 보도한 조선일보 1939년5월25일자 기사

◇신예작곡가 임동혁 작품 연주는 불발

열흘 후 속보가 나왔다. 로젠슈톡 대신 신향의 첼로 수석 출신인 사이토 히데오(齊藤秀雄·1902~1974)가 지휘를 맡고, 슈베르트 미완성교향곡과 롯시니 ‘세빌랴의 이발사’ 서곡, 베토벤 교향곡 5번(실제론 베토벤교향곡6번 연주)을 연주한다는 보도였다.

‘이번에는 그 악단의 명지휘자 로-젠스톡씨는 사정이 있어서 오지 못하고 대신 제등수웅(齊藤秀雄)씨가 ‘닥트’를 잡기로 되었다. 그 악단의 멤버는 제1 바이올리니스트 악연현주(鰐淵賢舟)씨 등 동경 악단의 일류가 망라되었으며…특히 우리의 신진 작곡가 임동혁씨의 작곡중에서 한 곡을 뽑아서 연주하리라 한다.이 악단의 내연은 우리 악단에 큰 충동을 줄것으로 예상된다.’(‘악단의 충동 신향 내연’,조선일보 1939년5월25일)

작곡가 임동혁(1912~?)의 작품을 연주할 예정이라는 보도였다. 임동혁은 1938년 도쿄니치니치(日日)신문이 주최한 음악콩쿠르에서 조선인 최초로 작곡 분야에서 입선한 이래 3년 연속 이 대회에서 입상한 기대주였다. 연희전문을 나와 일본 도요(東洋)음악학교에서 유학했고, 세브란스의전 음악부 강사와 경성방송관현악단 지휘자로 활약했다. 하지만 신향 경성연주회에서 임동혁의 작품은 연주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39년 6월 일본 신향을 이끌고 내한한 지사이토 히데오. 세계적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의 스승으로 유명하다. 사이토는 베토벤 교향곡 6번 전원과 슈베르트 미완성 교향곡을 지휘했다. /Public Domain

◇오자와 세이지 스승 사이토 히데오 지휘

경성 연주를 이끈 사이토 히데오는 1930년~1932년 베를린 뮤직호흐슐레에서 유학한 첼리스트 출신이다. 신향에서 가끔 지휘도 했다. 특히 1936년 로젠슈톡이 상임지휘자로 취임한 이후, 그의 영향을 받아 본격적으로 지휘자의 길에 들어섰다. 지난 2월 타계한 일본의 세계적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의 스승으로 유명하다. 오자와는 스승의 이름을 딴 사이토 키넨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1992년 나가노 현 마쓰모토시에서 사이토 키넨 페스티벌을 만들어 이름난 축제로 키웠다. 오자와를 가르친 사이토 히데오는 1972년 설립된 뉴재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고문과 ‘영구지휘자’로도 이름을 남겼다.

신교향악단 경성 연주를 보도한 동아일보 1939년 5월31일자에 실린 신교향악단 모습.

◇ ‘교향곡의 묘미를 보여준 快演’

사이토가 지휘한 신향은 10일과 11일 3차례 경성 부민관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티켓 최고가는 5원이었고, 3원,2원 순(順)이었다. 설렁탕 1그릇에 15전 하던 시절이었다.

레퍼토리는 조금씩 달랐다. 10일 저녁 7시반엔 베토벤 교향곡 6번 전원, 슈베르트 ‘로자문데’, 비제 ‘카르멘’ 모음곡, 요한 슈트라우스의 ‘푸른 도나우강’이었다. 11일 낮1시30분엔 슈베르트 미완성 교향곡을 골랐다. 비제, 슈트라우스는 같았다. 11일 저녁 7시반엔 유명 바이올리니스트 와니부치 겐슈가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했다. 슈베르트 미완성 교향곡, 롯시니 ‘세빌랴의 이발사’ 서곡, 바그너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서곡을 연주했다. 롯시니, 비제를 제외하면 독일 음악 중심이었다.

부민관은 가득 찼다. 신향 연주는 ‘교향곡의 ‘제호미’(醍醐味·묘미,참다운 맛이란 뜻의 일본어)를 맛보기에 충분한 쾌연(快演)’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그 혼일화한 정연히 통제된 연주는 관중을 매료’시켰고, ‘만당(滿堂)의 관중의 떠날 듯한 박수갈채’도 마땅하다고 썼다. (이상,’音樂街', 박문 제10호, 1939년8월)

◇ ‘와니부치의 브루흐 협주곡은 미흡’

와니부치 겐슈(鰐淵賢舟·1908~1983)는 프라하 음악원을 졸업한 바이올리니스트로 신향과 종종 협연했다. 조선 최초의 베를린 유학생인 바이올리니스트 김재훈(1903~1951)은 사이토의 지휘에 대해선 높이 평가하면서도 와니부치의 연주에 대해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아쉬워했다. ‘신교향악단연주는 비록 소규모였지마는 본격적인 연주를 들려준 점에 대하여 공헌이 컸음을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동 악단의 지휘자 제등(齊藤)씨는 가장 침착한 기교의 소유자였다. 이 점으로 지휘자와 연주자간에 긴밀한 팀웍을 스스로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제금(提琴)협주곡에 있어서는 독주자 악연(鰐淵)씨의 곡상조종(曲想操縱)이 무르녹지 못한 곳이 있었음은 현 악단 제1인자로서의 명예를 다소 잃어버리지 않았는가 생각된다.’(‘음악계총평’, ‘조광’제5권12호, 1939,12)

주관적 판단이지만, 베를린 유학파 출신 바이올리니스트이자 경성음악전문학원 원장을 지낸 김재훈의 평가도 무시할 수 없다.

◇로젠슈톡이 지휘한 1940년 신향 연주

신향은 이듬해인 1940년 6월 경성을 다시 찾았다. 무대는 역시 부민관이었다. 일제의 한글 민간신문 강제폐간 직전인데다 전쟁 분위기 때문인지 2차 신향 연주는 덜 알려졌다. 상임지휘자 로젠슈톡이 이끈 신향은 전년보다 훨씬 많은 70여명의 단원이 출동한 ‘대규모’였다. 특히 1939년 9월 조선인 최초로 신향에 입단한 바이올리니스트 문학준(1914~1984)이 제1바이올린 주자로 참여해 주목 받았다.

신향은 전해와 같이 3차례 연주했는데, 베토벤, 브람스, 멘델스존, 스메타나, 요한 슈트라우스, 차이코프스키 작품을 골랐다. 1940년 6월15일 저녁 7시반 베토벤 교향곡 5번, 멘델스존 ‘한 여름밤의 꿈’ 서곡, 스메타나 ‘팔려간 신부’의 춤곡 3(폴카, 푸리안트, 코미디언의 춤)을, 16일 저녁 7시반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 브람스 헝가리 무곡 5번과 6번, 요한 슈트라우스 ‘무궁동’(無窮動·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움직임) , ‘박쥐’ 서곡,스메타나 ‘몰다우’를 연주했다. 16일 오후엔 ‘백의 용사’위문 공연 형식이었는데, 베토벤 교향곡 5번,브람스 헝가리 무곡 5,6,스메타나 ‘몰다우’를 연주했다. 신향의 16일 저녁 경성연주는 경성방송국을 통해 현장 중계됐다.

◇1929년 메트 오페라 지휘한 로젠슈톡

요셉 로젠슈톡(Joseph Rosenstock·1898~1985)은 폴란드 출신 유태인 지휘자였다. 30대 초반의 로젠슈톡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독일 오페라 전담 지휘자로 모셔갈 만큼 촉망받던 신예였다. 1929년 10월 30일 바그너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데뷔했고, ‘장미의 기사’ ‘발퀴레’ ‘로엔그린’등 독일 오페라를 잇따라 지휘했다. 하지만 부정적인 평단 반응에 상처받았던지 보름여만에 메트로폴리탄 무대를 떠났다. 그는 1933년부터 만하임에서 지휘자로 활동하다 1936년 신향 상임지휘자로 초빙받았다. 유태인 박해가 공공연하게 이뤄진 독일에서 사실상 망명에 가까운 출국이었다.

음악팬들은 경성방송국 중계방송을 통해 로젠슈톡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다. 로젠슈톡의 신향 연주는 경성방송국 제1라디오(일본어), 제2라디오(한국어)를 통해 정기적으로 중계됐다. 신향은 방송 연주를 할때는 ‘일본방송교향악단’이란 명칭을 썼다. ‘조선 뉴스라이브러리’로 검색하면, 로젠슈톡의 신향은 1937년2월 26일 러시아 작곡가 보로딘의 교향시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와 교향곡 2번을 시작으로 최소 연 2~3회씩 경성방송국 전파를 탔다.

◇경성방송국 중계로 익숙한 로젠슈톡

로젠슈톡은 1944년 일본인만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게 한 정책으로 지휘대에서 밀려나 가루이자와 수용소에 감금됐다. 하지만 그의 대타인 오타카 히사타다, 야마다 가즈오의 지휘 연습을 지도했고, 이들은 전후 일본의 주요 지휘자로 성장한다. 로젠슈톡은 도쿄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일본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습도 지도해 사실상 일본 오케스트라의 대부역을 했다.

로젠슈톡은 1946년 전후 미국에 건너가 1952년 뉴욕 시티 오페라 총감독으로 활약했다. 1961년1월31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트리스탄과 이졸데’로 복귀한 이래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로엔그린’과 ‘반지’시리즈 등 바그너 작품을 주로 지휘했다. 1969년 2월13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마지막으로 메트로폴리탄 무대에서 물러났다. 메트로폴리탄 극장에서만 8년간 248회 지휘대에 오른 베테랑이었다.

◇전문 교향악단 첫 연주는 하얼빈 교향악단

신향의 경성 연주는 국내 첫 전문 교향악단 연주로 꼽히는 하얼빈 오케스트라의 내한 3개월만에 전격 성사됐다. 러시아 연주자 중심의 하얼빈 교향악단은 1939년 3월 일본 순회연주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경성에 들러 연주회를 가졌다. 3월26일 오후7시 부민관에서였다. 하얼빈 교향악단은 유럽 연주자들이 중심인 상하이 오케스트라와 함께 아시아에서 쌍벽을 이루는 단체였다.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글린카·무소륵스키 등 러시아 작품 연주

경성 연주 주최자는 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였다. 이 신문은 ‘반도 최초의 본격적 심포니’를 내세워 홍보했다. 3월 한달만 12차례 기사를 쏟아내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후원으로 나선 조선방공협회는 1938년 8월15일 중일전쟁 전시총동원체제 수립을 위해 결성한 관제단체였다.

경성 연주회는 러시아 지휘자 세르게이 슈와이코브스키가 이끌었다. 일본과 만주국 국가 연주를 시작으로 베토벤 ‘에그몬트’ 서곡, 교향곡 5번’운명’, 글린카의 ‘루스란과 루드밀라’, 무소륵스키 ‘민둥산의 하룻밤’,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스페인기상곡’이 레퍼토리였다.티켓값은 4원, 3원, 2원 순으로 상당히 비쌌다. 도쿄 연주회와 같은 가격이었다.

◇ ‘김빠진’운명’ 교향곡, 하지만 금관에 환호’

최초의 외국 전문교향악단 연주에 대한 반응은 엇갈렸다. 경성의 음악팬들은 음반과 라디오로 이미 작품을 접한데다 일본 평단의 차가운 반응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일본 교향악단은 독일 지휘자들이 조련한 정확하고 엄격한 독일식 사운드를 추구했다. 여기에 익숙한 일본 평단은 급조된 단원들이 섞인 하얼빈 교향악단 연주가 거칠고 투박하다고 비판했다.

홍난파는 1부 베토벤 연주에 대해 ‘평소부터 우리가 세계 일류급의 지휘자와 교향악단의 연주를 레코드로나마 너무 많이 들었던 만큼, 이날 밤 우리의 실망도 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동아일보 1939년3월30일)고 썼다. 하지만 2부 러시아 작곡가 프로그램에 대해선 ‘동양에 있어선 다시 얻기 어려운 명연(名演)이라고 생각한다”고 호평했다.

지휘자의 무능과 연주력을 꼬집은 비평도 나왔다. ‘김빠진 ‘제5′(운명교향곡)에 베토벤의 데스마스크가 졸지나 않았는지’라면서도 ‘부분적이나마 우수한 연주자-특히 금관악기 등에-를 본 것은 큰 기쁨이요 또한 심포니에 굶주린 이 땅 음악팬에겐 갈자(渴者)에 냉수(冷水)였음도 사실이니 크게 감사해야할 일’이라고 썼다.(‘음악실’, 박문 제8호, 1939.6)

◇'내선일체 문화사업으로 추진’

하얼빈 교향악단과 신향의 두 차례 연주는 본격 교향악 연주를 갈구하던 음악팬들의 기대를 잠시나마 충족시켰을 것이다. 홍난파는 ‘만시지탄’’열광’같은 단어를 써가며 교향악의 진수를 보여준 연주를 높이 평가했다.’하얼빈교향악단과 동경신교향악단의 두 단체를 맞이하여 조선에 있어서 양악(洋樂)의 역사가 있은 지 반세기를 지난 오늘에 비로소 교향악다운 교향악의 실연을 처음 들은 것은 비록 만시지탄은 있을 망정 과연 예상 이상으로 반도의 호악가(好樂家)들을 열광시키었으며…'(‘조선 악단 1년의 회고’下,동아일보 1939년12월16일)

이경분 교수에 따르면, 신향 경성공연은 하얼빈 악단 연주후에 급조됐고,’내선일체 분위기 도모를 위해 더 없이 효과적인 문화사업’으로 추진됐다고 한다. 주최자인 경성 YMCA는 조선인으로 구성된 황성 YMCA를 흡수통합한 일본인 엘리트 종교단체였다. 수준 높은 문화 공연으로 일본의 우월감을 과시하면서 자발적 복속을 이끌어내는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광복 직후 고려교향악단 출범

이런 의도와는 별개로 하얼빈 교향악단과 신향의 연주는 조선인에 의한 본격적 교향악단 설립을 촉구하는 움직임으로 비화했다. 홍난파는 만주국 수도 신경에서도 거액을 들여 신경교향악단과 음악학교를 설립하고, 하얼빈 교향악단도 시에서 연(年) 수만원의 예산을 지원하는데, 대도시 경성에 음악학교나 교향악단 하나 없는 것은 ‘자괴막심(自愧莫甚)한 일’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광복 한달만인 1945년 9월15일 고려교향악단(서울시향 전신)이 출범한 것은 하얼빈 교향악단, 신향 연주에 자극받은 음악계의 대응인 셈이다.

◇참고자료

이경분, 문화,정치적으로 본 신교향악단의 경성연주회(1939~1940), 한국예술연구 제29호,2020

이경분, 중일전쟁 시기 동아시아 교향악단 교류:하얼빈 교향악단의 일본 연주여행과 경성연주회(1939)를 중심으로, 아시아리뷰 제7권제2호(통권 14호),2019

김재훈, 음악계총평, 조광제5권12호, 1939.12

음악실, 박문 제8호 1939년 6월

음악가, 박문 제10호 1939년 8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아카이브( https://archives.metopera.org/MetOpera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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