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기억] 소달구지와 아이들

2024. 5. 4.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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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달구지, 전북 고창, 1973년 ⓒ김녕만
아이들을 가득 태운 소달구지가 보리밭 옆을 지나고 있다. 꼬박 걸어서 집에 가야 할 판인데 옆집 아저씨의 소달구지를 만났으니 운수대통한 날이다. 울퉁불퉁한 길이라 달구지가 삐거덕거리고 덜컹대도 횡재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종종 길에서 소달구지를 만나면 아이들에겐 행운이지만 그러지 않아도 짐이 무거운 소에게는 피하고 싶은 불운이 아닐 수 없다. 자동차가 드물던 시절, 설사 자동차가 있다고 해도 자동차도로가 없으니 무용지물이던 그 시절 시골길에는 소달구지가 요긴한 이동 수단이었다. 오일장에 나가려면 농부는 새벽부터 소에게 여물을 잔뜩 먹여 배를 든든하게 채워주고, 시장에 내다팔 쌀이며 콩 같은 곡식 가마니를 달구지에 싣고 일찍 집을 나섰다. 가지고 간 곡식이 일찌감치 다 팔리면 이번엔 집에서 쓸 물건을 사서 싣고 가볍게 돌아오는데 이때 하교하는 동네 아이들과 마주치면 소달구지는 만원이 된다.

그러나 실망하기에는 이르다. 멀리 가지 않아 장난꾸러기들은 느린 소걸음이 답답해서 팔짝 뛰어내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제 발로 바람을 가르며 뛰어가는 편이 속 시원할 팔팔한 아이들이다. 벌써 뒷자리 아이들의 표정에 따분함이 역력하다. 아마 이 길의 모퉁이를 돌아설 때쯤 “에잇!”하고 뛰어내릴지 모르겠다. 상황 파악이 빠른 여자아이가 그 기회를 노리며 묵묵히 소달구지의 속도를 따라가고 있다. 빈자리가 나면 냉큼 올라탈 심산이다.

산자락을 몇 개쯤 돌아야 마을에 도착하려나. 오른쪽에 외딴 초가집 두 채는 아직 더 깊이 들어가야 동네가 나올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보리밭에선 보리가 파랗게 물결치고 길가의 나무와 산등성이 모두 초록으로 물들어 짙어가는데 소의 고삐를 길게 늘여 잡고 앞장선 농부의 아내와 그 뒤를 소걸음으로 따라가는 농부와 아이들. 잠시 시간이 멈춘 듯 박제된 고향 풍경이다. 다시 오월이지만 또다시 볼 수도, 그때로 돌아갈 수도 없는 추억이다.

김녕만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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