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 포섭된 KGB 첩자, 1983년 미·소 핵전쟁 막았다

2024. 5. 4.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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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전선, 정보전쟁] 이중스파이 〈상〉
1987년 미국 대통령 집무실에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만난 MI6· KGB 이중스파이 올레그 고르디옙스키(오른쪽). [중앙포토]
1985년 5월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의 영국 책임자 올레그 고르디옙스키는 갑작스런 KGB 본부의 부름을 받고 귀국했다. 영국 책임자로 승진한 지 3개월쯤 지난 뒤의 일이었다. 모스크바의 자택에 머무르던 그는 어느 날 외출 후 집에 들어오다 섬뜩함을 느꼈다. 평소 자택 아파트의 3개 열쇠 중 2개만 잠궈두는데 이날은 3개 모두 잠겨 있었던 것이다. 순간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 고르디옙스키는 즉시 영국 비밀정보국(MI6)에 알렸다. 그는 1975년부터 MI6를 위해 일하던 이중스파이였다. 연락을 받은 MI6는 비상시 고르디옙스키를 탈출시키기 위한 핌리코(Pimlico) 작전을 즉각 가동했다. 고르디옙스키에게 KGB의 감시를 따돌리고 열차와 버스를 이용해 핀란드 국경 근처까지 오게 했다. 1975년 7월 20일 그가 약속장소에 도착하자 MI6 요원들은 대기시켜 놓은 탈출 차량의 태워 바로 출발했다. 트렁크에 몸을 숨긴 고르디옙스키는 자신의 생사를 MI6에 맡긴 채 눈을 감았다. 불안하고 초조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자동차 오디오에서 장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핀란디아가 흘러나왔다. 소련 국경을 무사히 통과해 핀란드에 안전하게 도착했다는 MI6의 신호였다.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이어 핀란디아 찬가가 흘러나왔다. “밤의 공포와 위협은 사라지고 아침 햇살이 승리했으니 이제 너의 날이 왔다.” 트렁크에서 밤을 꼬박 지샌 뒤의 이튿날 아침을 맞은 그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소련으로부터 사선을 넘어온 자신의 처지를 위로하는 것 같았고, 배반자의 이미지 때문에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고 숨죽인 채 살아가는 이중스파이의 삶을 위로하는 것 같기도 했다.

서방 자유·풍요 보고 공산체제에 회의감

이중스파이의 삶은 항상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아슬아슬한 삶이다. 이중스파이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장구하다. 적국의 상황을 알아내는 가장 요긴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특히 냉전기 공산체제의 폐쇄성으로 인해 소련에 대한 정보수집이 어려웠던 시기에는 소련 내부에 심어 놓은 서방의 이중스파이 역할이 더욱 중요했다. 올레그 고르디옙스키, 드미트리 폴라코프, 올레그 펜콥스키 등이 당시 대표적인 소련내 이중스파이로, 서방의 냉전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의 활동을 연구하다 보면 이중스파이에 따라붙은 배신의 이미지보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희생한 그들의 신념에 눈길이 더 간다.

고르디옙스키는 아버지와 형은 물론 장인, 장모도 KGB에서 근무한 ‘정보 가문’ 출신이었다. 그러나 1966년 덴마크 코펜하겐에 부임한 뒤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억압적인 공산체제 아래 살다 서방의 자유와 풍요를 직접 목격하면서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결정적으로 1968년 체코 ‘프라하의 봄’이 소련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는 것을 보면서 공산체제의 정당성과 우월성에 대한 회의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내면적 갈등을 모스크바의 아내에게 전화로 토로하곤 했다. 그런데 이를 덴마크 정보기관이 감청하고 있었고, 덴마크는 이러한 사실을 긴밀한 협력관계에 있던 영국의 MI6와 공유했다.

정보전쟁
MI6는 1974년 봄 그에게 접근해 은밀하게 이중스파이를 제안했다. 고르디옙스키는 시간이 필요하다며 한 발 뺐다. 고민하던 그는 이듬해 여름 MI6의 제안을 수락했다. 돈, 사랑, 복수 등 그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다. 다만 미행하지 말고 사진 찍지 말라는 조건만 달았다. 자신의 신념이 ‘억압적이고 폐쇄적인 공산체제를 무너뜨리는 것’으로 변하고 있으니 그것만 믿어 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MI6도 미행하거나 감시하지 않았고, 기밀을 빼내오라고 독촉하지도 않았다. 고르디옙스키의 신념을 믿고 기다리는 절제의 품격을 보여 주었다. 오히려 MI6는 그에게 소련이 필요로 하는 정보들을 종종 주었다. 고르디옙스키가 승승장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였다.

신뢰 관계가 무르익자 고르디옙스키도 소련 내부정보를 가감없이 MI6에 제공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서방사회에 대한 KGB의 간첩망 구축 계획을 많이 알려주었다. 영국 노동당 대표를 역임한 마이클 풋 의원 등을 포섭해 영국 정치권에 소련 간첩망을 구축하려는 계획을 알려 준 것이 그 예다. 영국은 이 정보를 토대로 KGB의 작전을 무산시킬 수 있었다. 냉전이 정점으로 치닫던 1980년대 초반기에는 소련 지도부의 생각과 의중을 많이 알려 주었다.

손자병법도 적 스파이 역이용 ‘반간’ 중시

고르디옙스키의 역할이 빛을 발한 건 1983년 미·소간 우발적 핵충돌 위기 때다. 그 해 11월 나토(NATO)가 대규모 모의 핵전쟁 훈련을 실시하자, 소련 지도부는 미국이 기습 핵공격을 준비하는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핵무기를 탑재한 전폭기를 출격 대기시키고, 북해 함대의 잠수함 출항 대기 지시를 내렸다. 언제라도 우발적 핵전쟁이 발생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를 지켜본 고르디옙스키는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을 MI6에 상세히 알려주었다. 특히 소련 지도부가 실제 핵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는 점 등 서방이 잘 모르고 있는 소련 지도부의 의중을 가감 없이 전달했다. 그 증거로 나토의 핵 공격 준비 동향을 매일 매일 보고하도록 지시한 KGB의 훈령 내용도 보여주었다. MI6는 이를 마거릿 대처 총리에게 상세히 보고했다. 대처 총리는 이 정보를 토대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에게 연락해 소련에 대한 공세 수위 조절을 당부했다. 이에 따라 레이건도 공세 수위를 낮추고 비공식 채널을 통해 소련 지도부의 불안과 오해를 푸는 조치를 취했다. 자칫 미·소간 우발적 충돌로 비화될 수 있는 상황을 막는데 고르디옙스키가 제공한 정보가 큰 기여를 했다.

소련의 군 정보총국(GRU) 소속인 폴라코프와 펜코프스키도 냉전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데 기여한 이중스파이였다. 플라코프가 제공한 중·소 갈등 정보는 1972년 미국이 역사적인 닉슨 방중 등을 거쳐 1980년 미·중 수교에 이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중·소 갈등은 1969년 우수리강 국경분쟁 충돌 등 심각한 상황으로 치달았으나, 미국 일각에서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폴라코프는 중·소 양국이 전쟁을 생각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임을 수차례 확인해 주었다. 이에 미국은 중국이 소련 견제를 위해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올 것이라 판단해 대중 외교와 협상을 자신감 있게 주도할 수 있었다.

펜콥스키는 냉전초기 과대 평가된 소련 군사력의 실상을 서방에 정확히 알려 군비경쟁에서 미국이 오판하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가령, 당시 소련이 자랑해온 미사일 전력은 설계 오류로 인해 사정거리가 훨씬 짧고, 유도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며, 연료공급 부족으로 운용도 제한적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소련 미사일 전력에 두려움을 가졌던 서방은 이 정보 덕택에 안도했다.

이중스파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중요한 정보활동으로 여겨졌다. 손자병법은 적의 스파이를 포섭해 이중스파이로 역이용하는 반간(反間)을 중시하고 ‘반드시 후하게 대우하라(故反間不可不厚也)’고 명시했다. 고르디옙스키처럼 정보부족으로 인한 미·소간 오해와 불신을 해소시켜 우발적 핵충돌 가능성을 막은 것은 ‘세계를 구한 스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그들이 목숨을 걸고 전해준 소련 내부 정보 덕택에 서방은 소련의 안보볼모 위기에서 벗어나 냉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이중스파이들이 제공한 정보를 통해 소련의 기세등등한 자신감이 상당부분 허세였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소련의 이중스파이들이 냉전 승리의 물줄기를 자유진영 쪽으로 돌리는데 일조했다고 볼 수 있다. 영국 대처 총리와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미 레이건 대통령이 고르디옙스키를 직접 만나 격려한 것도 이 때문이다. 독서광인 빌 게이츠는 2020년 『스파이와 배반자 : 냉전기 가장 위대한 스파이 이야기』를 권장도서로 추천했다. 그러나 서방세계는 그들을 다 지켜주지 못했다. 이중스파이의 다수는 영국 MI6와 미국 CIA내 소련 첩자들이 제공한 정보 때문에 발각되어 처형됐다. 냉전기 소련과 손잡은 서방 정보기관의 이중스파이들의 활동도 만만치 않았다. 〈계속〉

최성규 고려대 연구교수. 국가정보원에서 장기간 근무하며 국제안보 분야에 종사했다. 퇴직 후 국내 최초로 비밀 정보활동의 법적 규범을 규명한 논문으로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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