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래잡기] 일하는 엄마에게 필요한 것은

2024. 5. 3.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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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 화가 베르트 모리조
육아와 노동으로 고된 일상에
자신 대신 젖 물린 유모를 그려
심란했던 워킹맘 마음을 표현
출산지원금 1억원 준다지만
일하는 엄마들 진짜 원하는 건
육아 배려·격려하는 사회문화

가정의 달 5월을 맞아 일하는 엄마들을 응원해 보고자 한다. 이제는 엄마가 일하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 되었지만, 아직 사회 구조는 그런 변화를 따라주지 못하는 것 같다. 워킹맘의 심란함은 이미 19세기 말의 선구적인 화가 베르트 모리조의 작품 '유모'(1879)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모리조는 인상주의 운동의 한복판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중요한 화가인데, 왜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을까 생각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변화하는 현대 도시의 삶을 그린 다른 화가들에 비해 여성이었던 모리조에게는 마음대로 공간을 오가며 아무거나 그릴 수 있는 운신의 폭이 좁았고, 그래서 주위 인물이나 정원, 가족과의 나들이 정도로 다소 얌전한 소재의 작품만 제작할 수밖에 없었기에, 시대적으로 앞서간 대담한 기술에도 불구하고 덜 알려진 면이 있는 작가다.

모리조는 미술계의 총아 에두아르 마네의 동생 외젠과 결혼을 했는데, 형이나 부인에 비해서는 실력이 다소 뒤처졌던 외젠은 지금 보아도 파격적일 정도로 외조에 열심이었고, 덕분에 모리조는 출산 이후에도 열심히 그림을 그려 생계를 유지하는 실질적 가장 역할을 지속해 갔다. 물론 이미 결혼 전부터 "일은 내 존재의 유일한 목적이다. … 무한정 지속되는 여유는 모든 면에서 나에게 치명적이다"고 말할 정도로 지독한 일벌레이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늦은 나이인 30대 후반에 결혼하고 딸 줄리 마네를 낳은 이듬해, 모리조가 그린 '유모'는 19세기 서양에서 관습적으로 젊은 아기 엄마를 고용해 유모로서 진짜 엄마 대신 수유하던 시절의 한 장면을 보여준다. 수풀이 우거진 터에 자리를 잡고 젖을 물린 유모의 주위로 양산과 모자가 널려 있는데, 이미 유모가 모자를 쓰고
베르트 모리조의 '유모'.

있는 것으로 보아, 오른쪽 모자는 그림을 그리려고 팔을 걷어붙인 엄마 모리조의 것일 확률이 높다. 비록 자신은 그림 속에 없지만, 이 자리에 함께 있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소중한 자기 아기를 그린 그림이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상황이 다소 모순적이다. 화가 엄마가 일하는 동안 아기를 돌봐주는 유모를 그린 작품.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유모는 어딘가에 자신의 아기를 두고 나온 또 다른 일하는 여성이다. 모리조는 붓을 휘두르고, 유모는 젖을 물리고, 두 여인 모두 몸을 사용해 한 아이를 키우는 데 협력하는 이 모습은 노동과 육아가 요상하게 뒤섞인 순간의 복잡한 심경을 보여주고 있다. 젖을 빨고 있는 아기의 얼굴은 비교적 또렷하게 그린 반면, 유모의 얼굴은 주위 풍경과 함께 뭉그러져 거의 알아볼 수 없는 '환경'의 일부분으로 만들어버린 질투 어린 구성에서도 이 평화로운 풍경이 엄마인 화가에게는 그저 달갑지만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모성애의 주인공은 다른 사람이고, 자신은 오히려 이 광경을 지켜보기만 한다는 사실이 뭔가 답답하고 맘에 들지 않는 듯 거친 붓놀림이 눈에 띈다.

초보 엄마 시절을 벗어난 모리조는 이후에도 딸이 성장하는 모습을 독보적인 기법으로 그려냈다. 때로는 혼자, 혹은 아빠와 함께, 가끔은 애완동물과 함께한 모습으로 작품 속에 남은 줄리는 불행히도 10대 시절 양친을 모두 잃었다. 그래도 후견인이었던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의 보호와 오귀스트 르누아르를 비롯한 내로라하는 화가들의 물심양면 후원으로 줄리는 화가이자 모델, 작가로 훌륭하게 장성할 수 있었다. "아이 하나를 키우기 위해서는 마을 하나가 필요하다"는 서양 속담이 있는데, 비록 어린 시절 고아가 되었어도 줄리는 애틋한 마음으로 열심히 일한 엄마 모리조 덕에 당시 예술계 모두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잘 자라날 수 있는 특권을 누린 셈이다.

대부분의 일하는 엄마는 돈이 많이 들고 몸이 힘든 것은 잘 참을 수 있다고 말한다. 아이를 낳을 테니 1억원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아이가 클 때까지 배려하고 격려해주는 주위의 분위기만 만들어져도 워킹맘들은 이를 악물고 아이를 키우며 열심히 일할 것이다. 내 아이, 남의 아이 모두 귀하고 예쁘다고, 내 부모, 남의 부모 모두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전하는 5월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지현 OCI미술관장(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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