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의사, 중국의 엔지니어[김우재의 플라이룸](50)

2024. 5. 3.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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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의대 증원 추진에 반발한 전공의들이 병원을 떠난 지 60일째인 지난 4월 18일 서울 시내 한 대학병원에서 의료진이 이동하고 있다./연합뉴스



캐나다에서 살던 때의 일이다. 쇼핑몰에서 뛰던 아이가 넘어지면서 바닥에 튀어나와 있던 못에 무릎이 크게 찢어지는 일이 있었다. 오후 6시가 다 돼가던 시간이었고, 급하게 지혈을 하며 근처 병원 응급실로 차를 몰았다. 첫 번째 응급실 간호사는 아이의 무릎 상태를 자세히 보지도 않은 채 증상이 심각하지 않다고 판단했고, 두어 시간을 기다리다 지쳐 더 큰 대학병원 응급실로 향했으나 마찬가지였다. 8시간을 기다리고 나서 들어온 젊은 전공의들은 도대체 왜 이렇게 오랫동안 기다렸냐며 급하게 찢어진 상처를 꿰매는 수술을 진행했다. 그 후에야 캐나다에선 웬만큼 심각한 증상이 아니면 응급실이나 병원에 가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전 국민 무상 의료를 실시하고 있는 캐나다의 현실이다.

완벽한 의료체계란 없다

한국, 미국, 캐나다, 중국의 의료체계를 직접 경험하며 살았다. 미국은 잘 알려져 있듯이 의료비가 엄청나게 비싸다. 보험 없는 사람이 자칫 응급실이라도 실려 갔다간, 엄청난 빚더미에 앉게 될 수 있다. 하지만 돈 있는 사람들에게 미국 의료체계는 천국이다. 자본주의의 극단에서 만들어진 의료체계를 보고 싶다면, 미국을 보면 된다. 미국에서 아이를 출산할 때, 우연히 나중에 명세서를 보게 됐는데, 약 2000만원이 청구돼 있었다. 대학에서 제공해주었던 보험이 아니었다면, 가난한 박사후연구원이 낼 수 있는 수준의 금액이 아니었다.

캐나다는 의사가 부족하다. 의사가 얼마나 부족하냐면, 당장 죽을 정도의 질환이 아니면 의사를 만나는 것 자체가 힘들다. 한 지인이 피부질환으로 수술을 받고 싶어했는데, 미용 목적으로 판단돼 몇 년을 기다리는 걸 본 적이 있다. 물론 캐나다는 진짜 무상 의료를 추구하는 국가다. 암에 걸려도 무료로 치료받은 사례를 여럿 목격했다. 하지만 그건 소득의 절반 이상을 세금으로 내는 캐나다라 가능한 일이다. 또한 부족한 의사 수 때문에 무상 의료를 받기 위해선 기다림이 필수다. 캐나다는 미국에 경제적으로 종속된 국가다. 과학기술은 물론 의료체계까지 캐나다는 미국이라는 이웃의 대국에 영향을 받는다. 실제로 캐나다 사람들은 급한 경우에 미국에 가서 치료를 받는다. 그리고 캐나다 의대생들은 졸업 후 미국에서 의사로 일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캐나다보다 미국 의사의 연봉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중국은 의사가 인기 없는 직업이다. 물론 의사가 되면 공무원처럼 평생직장을 보장받을 수 있지만, 들이는 시간과 일하는 양에 비해 의사 연봉이 형편없다고 알려져 있다. 근처 병원의 의사가 공동연구를 원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과학자인 내 연봉의 절반도 안 되는 돈을 받고 일하는 걸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의사가 인기가 없으니, 의료체계가 공공의료 중심으로 유지되고, 결국 첨단 의료에서 뒤처지게 된다. 중국의 의료체계는 문명국가를 추구하는 중국의 큰 약점 중 하나다.

의대생 증원을 두고 의료계와 정부의 대립이 지속하는 가운데 교수들의 사직서 제출이 시작된 지난 3월 25일 서울의 한 대학 병원에서 의료진이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한수빈 기자



공대생이 만든 나라

실제로 첨단과학기술 분야 대부분에서 미국을 앞선 중국이 유일하게 미국과 한국에 뒤처지고 있는 분야가 의생명과학 분야다. 특히 반도체를 제외한 대부분의 산업 분야에서 중국에 주도권을 내주고 있는 한국은 지난 수십 년간 큰 규모의 투자와 더불어 여전히 중국보다 우위를 점유하고 있는 의생명과학 분야에 대한 장기적인 전략을 세울 필요가 있다. 최근 북경과 선전 일대의 의생명과학 관련 연구소와 회사들을 둘러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대로 게임이 진행된다면, 한국의 의생명과학 분야는 곧 주도권을 잃게 될지 모른다.

지난 4월 초에 미국 재무장관 재닛 옐런이 중국을 재차 방문해 태양전지판 등의 생산을 억제해 달라며 공급과잉의 우려를 전했다고 한다. 테무와 알리의 공습에서 알 수 있듯이, 이제 중국은 과잉생산을 통해 전 세계의 공급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고, 미국이 이를 위협으로 느낄 정도가 된 것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한국 언론은 중국에 관한 자극적인 기사만 내보내고 있고, 대통령과 정부는 아예 중국과의 관계에서 손을 뗀 상황이다. 그렇다고 더불어민주당이 딱히 제대로 된 대안을 가진 것 같지도 않다.

전병서 중국경제금융연구소장은 중국을 공대생이 만든 나라라고 말한다. 실제로 중국의 역대 최고 지도자 모두가 공대생이었다. 덩샤오핑은 프랑스에서 자동차공학을, 장쩌민은 상해 교통대 전기공학을, 후진타오는 칭화대 수리공정과를, 그리고 잘 알려져 있듯이 시진핑 현 주석은 칭화대 화학과를 전공하거나 졸업했다. 전병서 소장은 바로 이 중국 최고권력의 공대생 마인드가 서비스에 약한 공대생의 나라를 만들었다고 말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서비스업은 과학기술이라는 하부구조의 견고함이 없으면 결코 창발을 만들어낼 수 없다. 그것이 인도의 발전에 한계가 명확한 이유다.

의한민국

직업에 따라 노동의 대가가 어떻게 달라야 하는지에 대한 합의는 없다. 극단적으로 모든 노동에 대해 동일 시간 동일 임금을 주장할 수도 있고, 임금을 시장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직업별 노동의 가치를 사회적 맥락 속에서 정량화할 방법은 아직 없다. 그런 게 있다고 해도 완벽하지 않을 것이며 부작용이 더 클 것이다. 하지만 한 직업이 지나치게 큰 가치를 부여받는 사회에선 해당 직업의 가치를 평가하기 위해 사고실험을 해볼 수는 있다. 즉 해당 직업이 없다면 사회가 얼마나 빨리 무너질 것인지 상상해보는 것이다.

바로 이 사고실험을 통해 의사라는 직업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명확해진다. 의사는 분명 사회의 기능에 중요한 직종이며, 그들의 임금이 평균보다 높은 것도 당연하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사회는 의사만큼 중요한 다른 직종들에 대해서도 그 정도의 임금을 보장하는가. 엔지니어가 없는 사회를 상상해보자. 발전소가 멈출 것이고, 당장 전기와 통신을 비롯한 생존의 필수체제가 무너질 것이다. 즉 엔지니어가 사라진 사회는 의사가 없는 사회보다 훨씬 더 빠르게 무너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노동이 공정하게 대접받는 사회에선 공대생이 의대생만큼 대접받아야 한다. 적어도 미국과 중국은 그런 점에서는 공정성이 유지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엔지니어 중에 기회만 된다면 외국으로 옮기려는 비율이 얼마나 될까. 그 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면, 대안은 뻔한 것이다. 얼마 전 AI 분야 상위 인재의 대부분이 중국계 과학기술자라는 통계를 보았다. 중국은 과학기술 인재 양성에 국운을 걸고 움직여왔고, 한국은 의사 양성에 국운을 건 듯 움직여왔다. 의사가 나라를 구할 것이다. 그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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