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이 사라지는 나라[서중해의 경제 망원경](28)

2024. 5. 3.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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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민주의거 64주년인 지난 3월 15일 오전 이승만 기념관 건립 부지로 거론된 서울 종로구 열린송현녹지광장 앞에서 민족문제연구소 등 시민사회단체 회원들과 태고종 관계자가 기자회견을 열고 이승만기념관을 반대하고 있다. 연합뉴스



개방한 지 2년이 된 열린송현녹지광장(송현광장)을 녹지로 그대로 둘지, 기념관을 지을지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개방 2년 송현광장 활용안 물어보니’ 경향신문 기사를 읽어보니, 서울에 그나마 조금 남아 있는 열린 공간에 무엇인가 구조물로 채우겠다는 개발연대식 사고가 발현되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송현광장에는 이미 ‘이건희 기증관’ 공사가 계획돼 있는데, 또 이승만 기념관을 그곳에 건립하겠다는 것이다. 비어 있는 공적 공간에 구조물을 채우겠다는 의미다.

한국의 도시에는 곳곳에 공원과 운동장, 광장 등 다양한 이름의 공적 공간이 있다. 최근에 지어진 아파트단지나 신도시들은 구획과 정비가 매우 잘 돼 있고, 작은 공간이라도 주민들을 위한 시설을 마련해 두고 있다. 그러나 시민 모두에게 열려 있는 공적 공간으로 개방된 광장은 찾기 어렵다.

세종시를 보자. 세종시는 도시계획이 매우 잘 된 경우다. 아파트단지는 구획이 잘 돼 있고, 곳곳에 조그마한 공원들이 조성돼 있다. 공원마다 운동기구가 잘 갖춰져 있고, 벤치와 드문드문 작은 정자도 마련돼 있다.

그런데 세종시에서 생활은 건조하다. 신도시 특성상 문화적 깊이를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세종시에는 시민들에게 개방된 열린 공간이 드물다. 사람들이 만나고 머무르며 세상을 바라볼 공간이 없다. 아파트단지 내 공원은 일차적으로 단지 주민을 위한 시설로 구획 지어 있다.

세종시에는 가장 잘 조성돼 있다는 호수공원이 있다. 이곳은 쉼터로서는 훌륭하지만, 이 쉼터는 다른 용도를 허용하지 않는다. 자유롭게 집회를 할 공간도 허용돼 있지 않다. 세종시만 그런 게 아니다. 한국의 어느 도시를 가든 열려 있으면서 머물 수 있는 공간을 찾기 어렵다.

서울 광화문광장의 세종대왕상 / 연합뉴스



■ 공적 공간으로 개방된 광장 찾기 어려워

서울의 랜드마크라는 광화문광장은 원래 도로를 막고 광장을 만들어 머물러 있기 쉽지 않다. 세종문화 회관 쪽은 건널목이 없어져 보행에 장애가 사라졌지만, 다른 쪽은 여전히 신호등을 기다려 길을 건너야 한다. 광장에는 세종대왕 좌상 외에는 볼거리도 없다. 세종대왕을 잠시 기리고는 그곳을 떠나게 된다. 광화문광장이 아니라 광화문 간이역과 같다.

2002년 월드컵 당시 서울시청 앞 광장은 붉은 악마들의 응원이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한국문화공간의 아이콘이 됐다. 이제 그곳은 행사를 위한 장소가 돼 있다. 잔디가 깔린 광장에는 현재 ‘책 읽는 서울광장’ 행사가 4월부터 11월까지 진행되고 있다.

행사 이외의 목적은 허용되지 않는다. 한때 국군의 날 행사가 열리던 서울 여의도광장은 여의도공원으로 바뀌었다. 당시 여의도광장에서 국군의 날 행사는 군사정권의 권위를 국민에게 보여주는 관제 행사였다. 권위주의 시대가 가고 민주화 시대가 되면서 여의도광장은 공원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공원으로 바뀐 지금은 접근하기가 매우 불편하고 머물러 있기가 어려워 시민들은 오히려 한강 변으로 나간다. 광장은 사라지고 공원은 기능을 제대로 못 하고 있다.

도시마다 있는 시청사와 구청사 앞에는 형식적으로라도 광장이 조성돼 있다. 주요 철도역 앞에도 어떤 식으로든 광장이 있다. 그러나 이들 광장은 주차장으로 이용되거나 또는 여러 형태의 구조물이 공간을 채우고 있다. 그나마 비어 있는 공간은 지나는 통로에 불과하다. 보행은 어렵고, 사람들이 모이고 머물고 담소할 수 있는 공간을 허용하지 않는다.

광장이 사라지는 나라는 어떻게 우리의 현실이 됐을까. 정치철학자 마이클 왈저는 ‘도시 생활의 즐거움과 비용’ 이란 짧은 글에서 사람의 마음가짐에 빗대 도시공간을 단일 목적 공간과 열린 공간으로 구분했다.

단일 기능을 주목적으로 하는 도시공간이란 주거단지와 업무단지, 쇼핑몰 등이다. 단일한 목적이 지배적이어서 다른 기능은 허용되지 않거나 부수적이다. 열린 공간은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지 않고 다양한 기능을 수행한다.

전통적인 시장과 공원 그리고 광장이 열린 공간이다. 이용자가 주로 주민들인 아파트단지 안에 있는 공원은 단일 목적 공간과 열린 공간의 중간쯤에 있다. 열린 공간에서 사람들은 이방인을 만나고 타인의 시선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지고 참여하게 된다. 열린 공간의 특징은 다양성이다.

광장이 민주주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여러 계층의 사람이 모이고 분분한 논의와 이념이 교류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적 가격 체제는 이러한 광장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다. 도시 공간의 시장가격은 땅값과 구조물의 가치로 구성된다.

■ 광장 살리기는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길

비어 있는 공간의 경우에는 땅값에 잠재적 구조물의 가치가 더해진다. 비어 있는 공유지에 쇼핑센터를 지으면 ‘개발 이익’이 발생하고 이는 개발사업자에게, 그리고 시 당국에 호재가 된다. 그런데 땅값과 개발 이익에는 희생된 공공의 기회에 대한 가치는 빠져 있다. 광장의 가치평가에서 민주주의라는 공공의 가치를 반영하는 개발 프로젝트는 없다. 따라서 광장은 개발의 명분 앞에 사라질 위기에 처한다.

유럽의 도시는 광장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교회와 세속 권력이 경쟁하면서 성당과 궁정 앞에는 사람을 모을 수 있는 광장이 자리한다. 이곳에서 시장이 서고 축제가 열리고 반란과 처형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광장의 기능은 다면적이다. 시장이기도 하고, 축제와 문화 행사가 열리는 의식의 장소이기도 하다. 광장 자체가 예술작품일 수도 있고, 군중 집회의 공간이기도 하다.

현대로 오면서 광장은 민주주의가 꽃피는 장소가 됐다. 프라하의 봄은 바츨라프 광장에서 중동의 봄은 카이로의 타히르 광장에서 개화했다. 서울의 봄의 열기는 서울역광장에서 뜨겁게 달아올랐다. 청계광장에서 촛불은 민주주의의 열망을 밝혔다.

전제정치와 권위주의가 광장으로의 통로를 막았지만, 사람들은 여기에 굴복하지 않았다. 시장가격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무한의 가치를 광장은 갖고 있다. 광장을 살리고 유지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길이기도 하다.

서중해 경제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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