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쓰는 지금도 그 순대가 아른거린다…40년 내공, 푸짐한 국밥, 푸근한 인심

이준희 기자 2024. 5. 3. 14:0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여기 소문나면 곤란한데
동두천 수제순대·돼지국밥 보산분식
동두천 보산분식의 돼지국밥과 직접 담근 깍두기, 열무김치 등 반찬들. 이준희 기자
관광객을 상대하는 북적이는 ‘TV 맛집’은 사절합니다. 지역의 특색있는 숨은 맛집, 누가 가장 잘 알까요? 한겨레 전국부 기자들이 미식가로 이름난 지역 공무원들에게 물었습니다. 대답을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한두 군데 마지못해 추천하면서 꼭 한마디를 덧붙이네요. “여기, 소문나면 곤란한데.”

조난 신호를 타전하는 심정으로 “정말 맛있는 집인데 많이 알려지진 않아서 동네 미식가만 찾는 그런 가게가 없느냐”고 이리저리 수소문했다. 별 소득이 없어 전전긍긍하던 차에 동두천두드림장애인학교에서 체육 교사로 일하는 이경렬(40)씨가 “동두천 사람들이 대를 이어 찾는 맛집”이라며 한 군데를 소개해줬다. 분식이란 간판을 걸었지만 주메뉴가 수제순대와 순대국밥이라고 했다. 구조대의 응답 신호처럼 반가웠다.

보산분식. 보산동 토박이인 이경렬씨가 아버지를 이어 2대째 찾고 있는 단골집이라고 했다. “40년 전통”이라는 이야기에 한 번 혹하고 “수제순대”라는 차림표 목록에 또 한번 혹했다. 그리고 냄새에 취해 홀린 듯 가게에 들어섰다.

4인용 식탁 6개가 놓인 아담한 가게. 시장에 있는 전형적인 순댓국집이었다. 곧이어 가격표가 눈에 들어왔다. 순대국밥 8천원, 돼지국밥 8천원, 모둠순대(소) 1만2천원. 국밥이 1만원을 우습게 넘는 시대에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착한’ 가격표였다. 게다가 쌀은 물론 순댓국, 돼지고기, 김치, 고춧가루 모두 국내산이라니.

동두천 보산분식 메뉴판. 가격이 ‘싯가’로 적혀있는 ‘아무거나’ 메뉴는 고승애 사장이 그날그날 상황에 따라 삼겹살, 닭도리탕 등 요리를 내놓는다고 한다. 이준희 기자

반신반의하며 돼지국밥 하나와 모둠순대 작은 접시를 주문했다. 순대가 유명하니 꼭 먹어봐야겠고, 모둠순대를 시킨다면 순댓국보다는 돼지국밥이 낫겠다 싶었다. 주문을 마치자 부엌에서는 고기와 야채 써는 소리가 들려왔다. 10분 뒤 은색 쟁반을 들고나온 사장 고승애(61)씨가 돼지국밥과 깍두기, 열무김치, 새우젓을 차례로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우리 국밥은 양이 많으니까 일단 이거부터 잡수고 계세요. 나중에 (이)경렬이 오면 그때 더 시키든가 하시고.”

식탁에 놓인 돼지국밥을 쓱 쳐다봤다. 놀라웠다. 한눈에 보기에도 고기가 꽉꽉 들어차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숟가락으로 국을 몇 차례 휘저었다. 두껍게 썬 머릿고기가 국물 속에서 서로 의지하며 흔들리지 않고 버텼다.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대부분의 돼지국밥이 국물 속에 고기를 넣은 것이라면, 이건 층층이 쌓아놓은 고기편 더미에 국물을 끼얹은 형세였다. 공깃밥은 한눈에 봐도 꾹꾹 눌러 담은 고봉밥. “양이 많다”는 게 허언이 아니었다.

그래도 중요한 건 맛이다. 국밥집에선 일단 김치를 먼저 맛봐야 한다. 열무김치가 눈에 띄어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적당하게 잘 익은 열무김치는 짜지도, 맵지도 않고 시원했다. 입속에 상쾌한 기분이 가득 찼다. 깍두기도 하나 들어 입에 물었다. 아삭하는 식감이 상큼함을 더했고 양념이 과하지 않아 김치만으로도 입안이 즐거워졌다. 그다음엔 열무김치를 하나 더 흰 쌀밥에 올린 뒤 한입 더 맛봤다. 이번에도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다.

이제는 고기다. 숟가락을 들고 국물을 퍼 올렸다. 비계가 보기 좋게 붙은 고깃덩어리가 따라 올라왔다. 평소 고기를 얇게 썰어 넣는 돼지국밥을 즐기지 않았기에 취향에 딱 맞았다. 국물을 먼저 목구멍 깊이 흘려보냈다. 이른바 ‘잡내’는 전혀 없는데 국물이 진했다. 속이 확 풀렸다. 몇 차례 숟가락질을 더 하는데, 워낙 고기양이 많아서인지 계속 덩어리가 걸려 올라왔다. 대어가 줄줄이 낚이는 낚시 명소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한참 무아지경으로 국밥을 먹는데 고 사장이 접시 하나를 가져왔다. “일단 맛만 보세요.” 접시에는 머릿 고기를 비롯해 오소리감투, 수제 순대, 간, 허파 등이 담겨있었다. ‘맛보기용’이라기에는 양이 많았다. “보통 소 자를 시키면 이 정도 나오나요?”라고 물었다. 사장은 “작은 접시를 시키면 이것의 두 배쯤 나온다”고 했다. 머릿 고기를 들어 새우젓에 찍어 먹었다. 적당히 차가우면서도 쫄깃했고, 씹을 때마다 감칠맛이 났다. 함께 나오는 청양고추를 올려 먹으니 더 맛있었다.

순대 차례가 왔다. 공장식 순대가 아닌 수제 순대를 동두천에서 먹는다니. 탐스럽게 놓인 순대 하나를 집어 소금에 찍은 뒤 맛을 봤다. 꽉 찬 고소함이 입안에 퍼졌다. 순대를 씹으면서, “수도권 순대는 순대도 아니다”라고 말하던 지방 출신의 대학 후배들을 떠올렸다. 이 순대라면 그들에게도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으리라. 공식 상호가 ‘보산분식’임에도, 지역에선 이 가게가 ‘보산순대국’이라고 불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고승애 사장이 “맛만 보고 있으라”며 내놓은 모둠순대. 머릿고기, 순대, 오소리감투, 허파, 간 등이 들어있다. 이준희 기자

배를 채운 뒤 궁금했던 것들을 쏟아냈다. 맛의 비법이 궁금했다. “40년 세월에 답이 있다”고 했다. 그는 순대 제조법을 배워 장사하던 남편과 1986년 결혼했는데 그때부터 바로 순댓국을 끓이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집에서 요리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시작부터 맛이 좋다는 호평을 들었고 그 뒤로 한 번도 조리법을 바꾸지 않았다고 한다. 장사 초기엔 떡볶이와 튀김도 함께 팔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순대 전문으로 바꿨다. 가게 이름이 아직도 보산분식인 이유였다.

가격의 비밀도 궁금했다. 고 사장은 “아이고…, 그래서 팔아도 남는 게 없다”고 하더니 이내 비결을 털어놨다. “우리 집은 모든 걸 직접 준비해요. 순대는 매일 아침 남편(길문성씨)이 만들고, 김치는 때마다 일가 친척이 모여 함께 담급니다. 고향(강원도 철원)에 있는 친정 오빠가 농사를 짓는데 거기서 직접 키운 배추, 열무, 들깨, 고추를 씁니다. 중간에 새는 돈(유통 마진)이 없고, 우리 인건비야 동네 사람들 맛있게 먹는 걸 보며 ‘내가 좀 덜 먹지’ 하니, 이런 가격이 가능하죠.”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던 중 가게를 소개한 이경렬씨가 일정을 마치고 가게에 도착했다. 자리에 앉아 순대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고 사장이 모둠순대를 더 내왔다. 이제야 ‘소’ 자가 모두 나온 셈이었다. “국밥을 다 먹지도 못했는데 이미 배가 불렀다”는 이야기에 이씨는 “나도 늘 배가 불러서 나간다”고 했다.

푸짐한 것은 음식만이 아니었다. 이날 약 2시간 동안 가게를 찾는 손님들은 모두 고 사장과 유쾌한 대화를 나눴다. 집에서 만든 부각을 가져와 건네고 가는 이도 있었다. 어린아이와 가게를 찾은 부부 손님이 떠난 뒤 고 사장이 말했다. “둘이 연애할 때 오고, 애가 배 속에 있을 때 오고, 갓난아기 때 오고, 이제는 그 애가 말을 하고 걸으면서 저렇게 또 와요. 이런 모습을 보니까 내가 힘들어도 계속 직접 다 하는 거예요.”

보산분식의 요리를 책임지고 있는 고승애 사장. 이준희 기자

이날 둘이서 돼지국밥과 모둠순대로 배를 두둑하게 채우고 치른 음식값은 2만원. 기사로 소개할만한 가게일지 반신반의했던 마음은 구수한 순대와 푸짐한 주인장 인심에 풀린 지 오래였다. 돌아와 기사를 쓰면서는 침을 몇 번이나 꼴깍 삼켰다. 배가 불러 남기고 온 순대가 눈 앞에 아른거렸다. “열무김치 국수가 정말 맛있으니 꼭 먹으러 오라”던 고 사장의 마지막 말도 떠올랐다. 마치 수십 년 단골인 ‘나만의 작은 맛집’을 누군가에게 이미 빼앗기기라도 한 듯, 슬며시 이런 마음이 피어올랐다. “아, 여긴 정말 소문나면 곤란한데….”

글·사진 이준희 기자 givenhappy@hani.co.kr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