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한일전’ 아닌 ‘한일협력’ 논할 때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前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2024. 5. 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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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의 텔레스코프] 함께 소멸 위기 놓인 韓日

● 세상 변했건만 과거에 갇혀 있어서야…
● 소멸 극복 방안 = 양국 협력
● 日, 제국주의 시절 회귀 가능성↓
● 韓日 미래세대, 美·中 경제 발아래 놓일 수도
● 부끄럽지 않은 나라 물려주기 위한 ‘韓日 미래 비전’

내년이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이다. [Gettyimage]
세상은 변했는데 우리의 세계관과 사고가 과거에 갇혀 있다면 결국 변화가 우리를 집어삼킬 것이다. 국제정치에서 변화는 '나라를 집어삼키는' 변화로 밀려온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변화는 강대국의 흥망성쇠 등 여러 사례가 있지만 가장 혁명적 변화는 전근대 국제질서에서 근대 국제질서로 넘어가는 18·19세기의 변화다. 우리의 지배층은 이를 제대로 못 읽었고, 일본은 이를 읽고 개혁을 단행했다. 변화를 읽고 시대에 적응해 강력해진 쪽이 그렇지 못한 쪽을 지배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우리에게 뼈아픈 교훈으로 남아 있다.

전근대와 근대를 구별하는 몇 가지 기준이 있지만 그 핵심엔 '자본주의 산업화'가 있다. 자본주의 산업화엔 자본주의 시장과 그 안에서 합리적 계산을 하는 인간, 종교가 아닌 과학에 의한 문제 해결, 계약에 의한 신뢰 확립, 법치 등이 함께 따라온다. 위계적 신분 질서도 함께 무너졌다.

유럽은 18세기 산업혁명을 통해 본격적으로 근대에 진입했고, 자본주의 산업화가 만들어낸 엄청난 경제력·군사력으로 아직 남아 있는 전근대 지역을 근대 안으로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근대에 재빨리 진입한 일본은 그러지 못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산업을 일으키고, 국가를 근대적 제도로 개혁하고, 근대적 교육을 통해 근대적 국민을 만들고, 경제력·군사력으로 국내외 시장의 확대를 꾀하는 것이 당시 국가가 해야 할 일이다. 이를 단행한 일본은 19세기 말 강력한 근대국가이자 동시에 제국으로 등장했고, 조선은 전근대에 머물면서 일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공동 운명 놓인 韓日

제국주의는 국제질서에 근대를 입혀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폭력적 사건이다.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이 폭력적 사건으로 수많은 인명 피해와 인권 유린이 자행됐다. 하지만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국제질서에 근대적 시장과 제도, 과학과 합리성, 주권국가 간 계약관계, 인류 보편 가치, 다자적 합의 등이 도입됐다. 그 결과 인간은 지난 수십 년간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평화로운 시간을 만들어냈다.

이 근대적 국제질서를 우리는 '자유주의 국제질서(Liberal International Order)'라고 한다. 국제시장과 이에 따라오는 국제 제도 및 규칙, 다자주의로 작동하는 이 국제질서는 땅따먹기가 일상이던 전근대 국제질서와 확연히 대비된다. 무정부상태(Anarchy)라는 국제질서의 저주와 상관없이 인간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공간을 근대라는 공간으로 진보시켜 풍요와 평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 민족에 찾아온 역사상 가장 큰 행운은 식민지 독립과 함께 우리가 이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이루는 한 구성원이 된 것이다. 이 질서가 제공하는 기회를 가장 역동적이고, 풍요롭게 누린 것이 대한민국의 지난 수십 년 역사다. 이 질서를 통해 이제 대한민국은 일본을 포함한 다른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위치로 성장했고, 이 추세를 이어간다면 조만간 명실상부한 선진국 클럽의 일원으로 진입할 수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또 한 번 다가오는 시대의 혁명적 변화, 그리고 이에 대한 한국·일본의 대응에 대해서 적어보고자 한다. 한국과 일본을 콕 집어서 논의하는 이유는 이제 한국과 일본이 지배와 피지배를 걱정하는 단계가 아니라 시대 변화와 인구 감소로 공히 나라가 자체적으로 소멸하는 운명에 처해서다. 그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문화적으로 가깝고, 또 지리적으로도 떨어질 수 없는 양국이 서로 협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17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모스코니센터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오른쪽)이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악수하고 있다. [뉴스1]

對日 '과잉 공포' 넘어야

근대 국제질서인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한마디로 정의하면 '다자주의 제도와 규범으로 묶인 자유시장 국제질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질서에서 강대국의 군사력은 더는 국경선 확장과 변경을 위해서가 아닌, 자유롭고 개방된 국제시장의 안정과 현상 유지를 위해 사용된다. 국내에서 경찰이 수행하는 치안유지와 유사한 기능을 국제적으로 수행한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강대국은 '군사력 강대국'이 아니라 시장에서 성장한 '경제력 강대국'을 의미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과 독일은 군사력이 아니라 경제력만으로 세계 2위, 3위의 강대국이 됐다. 지금 세계 2위라고 하는 중국도 다른 강대국과 전쟁 한번 치르지 않고 개혁개방 이후 시장을 통해 초강대국이 됐다.

시장과 경제의 중요성을 인식한다면, 국가는 당연히 국방예산보다 경제와 복지 등에 훨씬 더 많은 예산을 사용하게 된다. 일례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시절 미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에 국방비를 최소 GDP 대비 2%까지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회원국들은 그 요구를 거부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후에 변화가 있긴 했지만 유럽의 강대국들은 여전히 군사력을 세계질서의 치안력 정도로 보고 있다. 일본도 지금은 1%를 조금 넘겼지만 고도성장기이던 냉전기에도 방위비가 GDP의 1%를 넘지 않았다.

일본의 방위 원칙은 방어 위주 전수방위 유지다. 최근 공격력을 조금씩 보충하고 있지만 타국을 무력으로 점령하고자 하는 공격력 획득은 관찰되지 않는다.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최대 수혜자로서 그동안 군사적 기여에서 무임승차를 했다는 비난을 덜기 위해 군사력을 강화하는 측면이 크다.

물론 막강한 경제력과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고, 과거 제국을 운영한 국가이기에 일본이 일순간 공격적 의도를 갖고 군사력 증강을 꾀할 우려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려면 전투력을 구성하는 젊은 인구의 급격한 감소와 헌법의 문제, 그리고 국내 여론뿐 아니라 미국 등 우방으로부터의 대대적 경제제재까지도 마주해야 한다. 즉 일본이 지금의 러시아나 중국보다 더한 '불량국가'의 반열에 들어가는 것인데,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핵심 멤버인 일본이 불량국가로 변화하는 국제 환경이 형성된다면 이는 단순히 일본이 아니라 제3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걱정해야 할 일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볼 때 지금 '친일파 청산'과 '한일전'이라는 구호로 일본을 적대국화하는 한국의 정치세력은 19세기 말 시대를 잘못 읽은 우리 선조들과 다름없다. 같은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최대 수혜국인 한국과 일본은 이제 함께 협력해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수호해야 하는, 이른바 국가이익을 공유하는 두 강대국이다. 지금은 한일전을 치를 때가 아니다. 한일 협력으로 같이 미래를 만들어가야 할 때다.

플랫폼 시장 분절화 + 저탄소 경제 = 韓日 미래 위기

2월 27일 서울 도봉구 도봉고에서 관계자가 교내 폐품을 정리하고 있다. 도봉고는 저출생의 여파로 학령인구가 급격하게 줄어들면서 3월 1일 폐교했다. [뉴스1]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가장 큰 변화를 불러올 두 가지 흐름은 인공지능과 데이터 경제로 대변되는 '세계 디지털 플랫폼 시장 분절화'가 그 하나이고, 또 다른 하나는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경제 체질을 '저탄소 경제'로 바꾸는 흐름이다. 전자는 국제시장이 미국·중국·유럽을 중심으로 블록화할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며, 후자는 에너지 및 경제 패러다임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의미한다.

상술하자면 근래 자유주의 국제질서와 국내 정치 권력 공고화 사이에서 흔들리는 러시아와 중국의 두 과거 회고적 지도자가 만들어낸 지정학적 위기가 세계 시장에서 공급망 조정이라는 또 하나의 리스크를 만들고 있다. 시장이 원활하게 돌아가기 위해서는 복잡하게 얽힌 글로벌 공급망 안전이 필수인데, 최악의 경우 앞에서 말한 블록화 흐름을 타고 미국·중국·유럽이 공급망을 자기 지역 중심으로 조정할 수 있다. 이는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몇 개의 지역 시장으로 분절화(fragmentation)됨을 의미한다.

이 블록화의 흐름에서 제외돼 있는 두 선진국이 바로 한국과 일본이다. 잘못하면 중국이나 미국의 경제블록으로 종속될 위험도 가지고 있다. 미래의 주류 시장으로 바뀌는 디지털 플랫폼 시장은 네트워크 효과가 발생해 폐쇄적 독점 시장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미국과 중국의 빅테크 기업이 플랫폼과 AI 생태계를 선점하면 한국과 일본은 그 플랫폼 안으로 종속될 수 있는 것이다. 유럽은 이 흐름엔 뒤졌지만 '유럽연합'이라는 자체 방어벽을 구축할 수 있다.

이 흐름이 강화되면 저출생 고령화로 인해 인구가 급속도로 감소하고 있는 한국과 일본의 미래세대가 직접적 타격을 받게 된다. 인구 감소와 시장 블록화로 인한 급격한 시장규모 축소, 현격한 군사 병력 감소, 노인 인구 급증에 따르는 부양 의무·비용 급증, AI 경제에 들어가는 막대한 에너지를 어떻게 저탄소 경제로 끌고 나갈지에 대한 과제를 풀어야 한다. 과연 현재 기득권 세대는 이 문제를 풀어서 미래세대에 넘겨줄 수 있는 역량과 구상을 가지고 있을까.

韓日 미래 비전, '대안 인구' 통합부터

이에 대한 해결책은 공통의 문제를 안고 있고, 또 공히 세계적 기술력을 갖고 있으며 문화적으로 가까운 한국과 일본의 미래세대가 서로 협력해 마련해야 한다. 우선 인구 감소 문제는 양국이 시장을 통합하면 당장 2억 명에 가까운 인구를 가진 시장이 되겠지만 통합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 국민도 많으니 양국의 '대안 인구' 통합을 단계적으로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대안 인구란 '인간 + 휴머노이드 로봇'을 의미한다. 로봇을 경제활동을 하고, 노약자를 보조하고, 국방에도 투입하는 '준인간'으로 보자는 것이다. 이미 미국과 중국의 빅테크 기업들은 AI와 결합된 준인간 로봇 시장을 겨냥해 대대적 투자를 하고 있다. 여기서 한국과 일본이 협력해야 하는 이유는 로봇 플랫폼을 공통의 표준을 통해서 개발해 준인간 인구의 통합을 구상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AI가 탑재된 로봇은 앞으로 플랫폼 시장을 구성하고 또 그 안에서 운용이 될 터인데, 한국과 일본이 공동 플랫폼을 구축해 지역 시장을 창출하자는 것이다. 플랫폼으로 블록화하는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대응하기 위해선 대안 인구의 플랫폼 통합이 필요하다.

국방과 관련해서도 급격히 감소하는 병력을 보완하는 길은 테크놀로지밖에 없다. 이를 위해서는 드론, 로봇 등이 운용되는 안전한 플랫폼 구축이 관건이다. 플랫폼 보안기술과 군사용 AI 개발도 세계적 기술력을 가진 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수행하면 공동의 플랫폼 시장을 방어하는 것과 다름없다. 상호의존이 강화된 공동 시장에 대해 공동 방어는 필수이고, 좀 더 깊이 있는 상호 간 인력 교류와 정보 접근은 양국의 신뢰를 강화할 수 있다.

현격한 생산성 증가를 가져오는 AI는 기존 산업에서 많은 일자리를 대체할 것이다. 당연히 새 일자리 창출이 미래세대의 국가적 과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일자리는 녹색산업과 바이오 분야에서 창출될 수 있다. 대체에너지와 배터리 등 다양한 환경산업, 스마트시티 구축과 바이오 등에서 기술과 표준을 공유하는 한일 공동 시장이 생긴다면 일자리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꿈과 같은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장벽이 많지만 변화의 물결에 아무런 저항 없이 휩쓸려 가지 않기 위해선 미래를 준비하고 만들어야 한다. 다소 공상과학소설과 같은 글을 썼지만 미래세대에게 부끄럽지 않은 국가를 넘겨주기 위해 '한일 미래 비전'이라는 화두를 하나 던져본다. 마침 다음 해가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이다.

이근
● 1963년 출생
●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미국 위스콘신대 정치학 박사
● 외교안보연구원(국립외교원) 교수
●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 한국위원회 의장
● 한국국제교류재단(KF) 이사장
● 現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 저서: '도발하라' '대한민국 넥스트 레벨' 外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前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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