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절’ 용어 변경은 김정은의 홀로서기?

김창수 2024. 5. 3.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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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주석 생일인 4월15일을 북한에서는 ‘태양절’이라고 부른다. 올해는 태양절 대신 ‘4·15’라고 불렀다. 김일성·김정일 그림자에서 벗어나 김정은 위원장의 홀로서기라는 분석이 제기되었다.
4월14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김일성 주석 생일 112주년 기념 행사. ⓒ평양 조선중앙통신

4월15일은 북한에서는 최대 명절이다. 고 김일성 주석 생일이다. 1997년 북한의 당과 국가기관은 이날을 ‘태양절’이라고 부르기로 결정했다. 수령 우상화 조치 가운데 하나다. 김일성 주석 112주년 생일인 올해는 태양절이라는 표현이 줄고 있다.

통일부 당국자가 “금년 2월18일부터 광명성절(2월16일·김정일 국방위원장 생일), 태양절 용어를 쓰지 않다가 4월15일 〈노동신문〉 관련 보도에서 (태양절 표현을) 한 차례 썼고, 그 이후로는 모두 ‘4·15’나 ‘4월 명절’로 대체해서 쓰는 중”이라고 밝혔다. 이 당국자는 “올해 김일성 생일을 맞아 진행된 여러 가지 정황을 보아 명칭이 바뀐 것으로 잠정 판단한다”라고 말했다. 태양절 대신 ‘4·15’라는 표현을 쓰는 데 대해 통일부 관계자는 “이례적이다”라고 밝혔다. 물론 통일부는 “다만 이 같은 동향이 계속될지는 내년 광명성절(2월16일)까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라고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

태양절 표현 감소를 두고 다양한 해석이 나왔다.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우상화 대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홀로서기를 시도한다는 분석이 제기되었다. 김정은 위원장이 선대 통일 유훈을 부정하고 ‘두 개의 국가론’을 내세운 것과 같은 맥락이라는 등 다양한 해석이 나왔다.

자유아시아방송(RFA)은 북한 소식통을 인용해 “당에서 이제부터 ‘태양절’이라고 부르지 말라는 지시를 내부적으로 하달했다”라고 보도했다. RFA 보도는 북한이 태양절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는 점에서 통일부 판단과는 조금 다르다.

김일성 주석 생일 112주년을 치른 북한의 움직임에 미세한 변화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조선중앙TV 보도에 따르면, 북한은 4월15일 전국적으로 김 주석 생일 축하 행사를 했다. 이 보도에 따르면, 북한 전 지역에서 태양절이라는 용어 대신 ‘4·15’나 ‘4월의 명절’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또 북한의 대표적 선전물 가운데 하나인 거리 선전판도 태양절보다 ‘4·15’를 썼다. 거리 선전판에서 태양절 용어가 완전히 사라졌는지는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태양절’이라는 용어를 완전히 폐기한 것은 아니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 4월15일자에는 ‘민족 최대의 경사스러운 태양절’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또 의회와 내각 기관지인 〈민주조선〉도 1면에도 ‘민족 최대의 경사스러운 태양절’이라고 보도했다. 조선중앙TV는 4월15일 북한 주민들이 김일성 묘소인 금수산태양궁전을 방문한 사실을 보도했다. ‘주체 최고의 성지 금수산태양궁전’ ‘수령 영생의 대화원 금수산태양궁전 공원’이라고 보도한 점을 보면, 김일성 주석을 ‘태양’으로 상징화한 조치를 완전히 폐기하지는 않은 것 같다.

2월9일 북한군 지휘성원들이 건군절을 맞아 금수산태양궁전을 방문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평양 조선중앙통신

신격화 거부하는 김정은 위원장

태양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빈도가 줄어든 것은 분명하다. 이는 김정은 위원장의 통치 스타일이 비현실적이고 신비스러운 수령 우상화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북한 사회주의가 다른 나라 사회주의와 작동 원리가 다른 결정적 이유는 수령제 사회주의라는 점이다. 수령이 뇌수이므로, 수령이 당과 국가 그리고 인민을 지도하는 체제가 바로 북한 사회주의이다. 북한은 수령의 절대성과 유일성을 강조하기 위해 수령 우상화 정책을 펼쳤다.

김정은 위원장도 취임 초기 이런 우상화 작업을 했다. 북한은 2014년 ‘우러러 따르는 김정은 동지’라는 제목으로 김정은 혁명일화집을 발간했다. 이 일화집에 따르면, 김정은 위원장은 세 살 때 총을 쏘고 운전했다고 한다. 아홉 살 때는 3초 이내에 총을 쏘아 맞히는 백발백중의 솜씨를 과시했다고 한다. 김일성 시대부터 수령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상징 조작이다.

북한은 수령제 사회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상징 조작을 해왔다. 김일성 주석을 민족의 태양이라고 칭하면서, 그의 생일을 태양절로 선포한 것도 이런 상징 조작 가운데 하나다. 수령을 신비롭고 성스러운 위대한 존재로 만들어 인민들의 감탄과 존경을 끌어내기 위한 수법이다. 이런 상징 조작은 국제사회에서는 북한 지도자 권위를 격하시키는 역효과를 내기도 했다.

북한의 상징 조작은 태양절과 같은 기념일 지정이나 신격화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금수산태양궁전 같은 기념관, 김일성·김정일 부자 동상뿐 아니라 각종 노래나 그림 등 일상에 자리 잡았다. 북한 체제가 수령의 유일성으로 유지되는 체제여서 이런 상징 조작은 앞으로도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김정은 위원장은 몇 년 전부터 이런 관행을 일부나마 바꾸려고 시도했다. 2019년 3월, 김정은 위원장은 선전 일꾼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수령의 혁명 활동과 풍모를 신비화하면 진실을 가리우게 된다”라고 썼다. 수령 무오류론까지 언급하고 있는 북한 사회에서 이런 발언은 파격적이었다. 그는 “수령은 인민과 동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인민과 생사고락을 같이하며 인민의 행복을 위하여 헌신하는 인민의 영도자”라며, “수령에게 인간적으로, 동지적으로 매혹될 때 절대적인 충실성이 우러나오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김정은 위원장이 2019년 2월26일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을 위해 전용열차를 타고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베트남 랑선성 동당역에 도착해 손을 흔들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이 같은 파격적 발언은 김정은 위원장이 소년기를 유럽에서 보낸 점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더 직접적인 배경이 있다. 이 서한을 보내기 직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실패가 직접적 이유다. 2019년 2월, 김정은 위원장은 북·미 정상회담을 위해 베트남 하노이까지 4000㎞가 넘는 거리를, 기차를 타고 60여 시간 동안 달려갔다. 하지만 정상회담은 결렬되었다.

보통 실패한 정상회담은 없다고 한다. 양국이 사전에 실무적으로 조율하기 때문이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은 실무협의를 거치지 않았다. 김정은 위원장이 전권을 행사했고 결렬되었다. 결렬의 책임은 미국 국내 정치에 발목 잡힌 트럼프 대통령에게 있지만, 북한 내부에서 수령의 위대함이 손상된 것을 부정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때 김정은 위원장은 수령에 대한 충실성을, 인민을 위해 헌신하는 지도자상에서 찾아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또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실패에서 벗어나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다. 국내적으로는 정면 돌파와 자력갱생을 강조했고, 국외적으로는 러시아와 중국과 관계를 두텁게 하려 했다. 정면 돌파를 위해 군사력을 강화하고 인민대중 제일주의를 내세우며 주민들에게 친화적인 지도자상을 만들려 시도한 것이다. 김 위원장이 주택 건설에 매진하는 것도 주민 친화적인 지도자상을 만들기 위해서다.

이번 태양절 또는 4·15 행사와 관련한 북한 매체 보도는 인민을 위한 김일성 주석의 봉사하는 삶에 맞춰졌다. 김일성 신격화보다 백성을 하늘같이 여긴다는 이민위천(以民爲天)을 강조한 것이다. 이민위천은 사마천의 〈사기〉에 나온 표현이지만, 북한은 김정은 위원장이 내세우는 인민대중 제일주의를 표현하는 용어로 사용해왔다.

“선임자들 의존 정책 매우 잘못되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평양의 화성지구 2단계 1만 세대 살림집(가구) 준공식에 참석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4월17일 보도했다. ⓒ평양 조선중앙통신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좌절된 뒤 김정은 위원장은 선대를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계속 이어갔다. 2019년 10월 김 위원장은 김일성·김정일이 추진해온 금강산 관광을 뒤집었다. 그는 금강산을 방문해 “손쉽게 관광지나 내어주고 앉아서 득을 보려고 했던 선임자들의 잘못된 정책”이라며 “국력이 여릴 적에 남에게 의존하려 했던 선임자들의 의존 정책이 매우 잘못되었다”라고 말했다. 사실상 선대의 유훈 사업을 비판한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김일성 주석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태양궁전을 방문하는 횟수도 줄고 있다. 집권 초반기에는 매년 10여 차례 방문했다. 지난 2년간 매년 3회 정도 방문했고, 올해는 4월15일에도 찾지 않았다.

다만 김정은 위원장이 수령의 위대성이라는 북한 사회주의의 특징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는 2019년에만 백두산을 두 차례 올랐다. 할아버지 김일성 주석의 백두산 행보와 비슷한 여정을 따랐다. 김일성 주석의 항일투쟁을 연상시키려 했다.

북한이 태양절이라는 표현 사용을 줄였다고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을 부정하는, ‘김정은 홀로서기’로 볼 수는 없다. 김정은 위원장이 수령제 사회주의라는 플랫폼을 떠나 홀로서기를 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다만 김정은 위원장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수령제 사회주의라는 플랫폼에서 작동하는 애플리케이션을 만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일성·김정일 유훈인 통일 과업을 부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좌절이라는 위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애플리케이션을 만들어 북한의 수령제 사회주의를 작동시켜왔다. 그 애플리케이션이 과거와 같은 수령 신비화에서 일부 벗어나 작동하고 있다. 그 기능이 폐쇄사회 북한을 뚫고 조금씩 드러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에 대비해야 한다.

김창수 (전 코리아연구원 원장)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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