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회장의 짝짝이 젓가락 [아침햇발]

이봉현 기자 2024. 5. 3.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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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등 참석자들이 지난해 12월6일 부산 중구 깡통시장을 방문해 떡볶이를 시식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이봉현 | 경제사회연구원장 겸 논설위원

워낙 진기한 장면이라 오래 들여다보니 깨알 같은 차이가 눈에 들어왔다. 지난해 12월 초 윤석열 대통령이 대기업 회장들을 병풍처럼 세우고 부산 깡통시장에서 떡볶이를 먹는 사진에서였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젓가락만 달랐다. 대통령과 다른 회장들은 짝이 맞는 붉은 젓가락을 들고 있는데, 이 회장만 붉은색-검은색 짝짝이였다. 좁은 탁자 한쪽의 수저통에 두가지 젓가락이 섞여 꽂힌 걸 보니, 정신없었을 어묵집 아주머니가 손에 잡히는 대로 건네준 모양이었다.

생각은 곧 젓가락과 삼성전자의 인연으로 흘렀다. 사실 젓가락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 반도체 회사의 탄생 설화에 나오는 ‘기물’이다. 타계한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은 1974년 다 쓰러져가는 한국반도체를 인수해 훗날 삼성 반도체의 씨를 뿌린다. “텔레비전도 제대로 못 만들면서 반도체는 과욕”이란 만류가 심할 때 이건희는 “개인 돈으로라도 지분을 사겠다”고 밀어붙인다. “우리는 젓가락 문화권이어서 손재주가 좋고 신발을 벗고 생활하는 등 청결을 중시한다. 이런 문화는 반도체 생산에 아주 적합하다.” 시대가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넘어가는 조짐인데, 정보화의 핵심인 반도체 제조가 우리 민족의 재주와 특성에 딱 들어맞는다고 설득한 이건희의 ‘젓가락 문화론’이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도 저서에서 젓가락을 쓰는 민족이 21세기 정보화 시대를 지배할 거라 썼다. 그래서인지 지난 50여년간 첨단 반도체 제조는 한국, 대만, 일본 등 젓가락을 쓰는 동아시아 국가가 석권했다.

아버지의 젓가락이 미래와 결단의 알레고리였다면, 이재용 회장의 짝짝이 젓가락은 무엇일까? 누군가는 ‘엇박자’를 떠올릴 것이다. 산업의 흐름을 읽고 앞서 준비하는 촉이 무뎌진 삼성전자의 지금 모습이다. 인공지능 시대에 수요가 급증한 고대역폭메모리(HBM)의 가능성을 간과해 하이닉스에 선두를 내주고 고전 중이다. 웨이퍼에 회로를 새기는 전공정의 정밀도를 극한으로 높이는 데 몰두했으나, 패키징이나 테스트 같은 후공정이 중요해지는 추세는 놓쳐 파운드리에서 1위 티에스엠시(TSMC)와의 격차가 더 벌어졌다. 시스템반도체 같은 새로운 영역에서 성과는 지지부진하고, 이젠 메모리와 파운드리에서도 국가의 전폭적 지원을 업은 미국 마이크론, 인텔이 도전장을 내미는 상황이다.

금융가에서 나오는 삼성전자 위기론은 지난 10년을 ‘잃어버린 시간’이라 규정한다. 이 회장이 쓰러진 선대 회장을 이어 그룹 경영의 키를 잡은 시기와 겹친다. 이름을 밝히지 말라는 전 정부의 핵심 정책담당자는 과거에 성공을 일궈낸 삼성의 사업구조가 작동하지 않는 것 같다고 진단한다. “삼성 사람들은 ‘황금의 삼각형’, 즉 회장의 리더십, 전략실의 기획력, 그리고 엔지니어 출신 최고경영자의 집행력이 ‘초격차’를 만드는 동력이라 자랑하곤 했다. 그런데 그중 두 모서리, 즉 회장의 리더십과 전략기획 기능이 허약해졌다. 특히 국정농단에 휘말려 미래전략실을 해체한 뒤로 합법적, 정상적으로 컨트롤타워가 작동해 만들어내야 하는 시너지마저 사라진 듯하다”는 것이다.

달리 보면 짝짝이 젓가락은 창의와 혁신의 은유일 수 있다. 젓가락 색을 맞춰 밥을 먹어야 한다는 것도 고정관념이다. 다니던 길로만 가려는 사람은 새길을 만들지 못한다. 기업 흥망성쇠의 역사에서 1등 기업은 성공의 경험이 늘 함정이다. 변해야 할 때 안주하다 새 패러다임으로 치고 나오는 도전자에 무너진다. 미래 먹거리가 될 기술과 특허를 잔뜩 쥐고도 사업 전환에 실패한 제록스나 코닥이 그랬다. 인텔도 컴퓨터 중앙처리장치(CPU)의 달콤한 수익성에 안주하다 모바일 시대에 존재감을 잃었다. 과거의 삼성전자는 달랐다. 기술의 가능성에 과감히 투자해 성장동력을 발굴했다. 자신의 비전을 고집스레 추구해 플래시 메모리, 엘시디(LCD), 스마트폰에서 시장을 만들고 선점하곤 했다. 지금 삼성전자에 필요한 것은 낯선 것에 직면할 용기와 스티브 잡스가 혁신의 동력이라 말한 ‘배고픔’일 것이다.

삼성전자에 좋은 것이 내게도 좋은 거냐고 묻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국내총생산(GDP)의 10% 이상을 담당하는 삼성전자의 실패는 한국 경제에 재앙임이 분명하다. 외신에서는 벌써 제조업 한국의 황혼을 얘기하고 있다. 반도체가 특급 전략물자 취급돼 나라마다 보조금을 들이붓는 국가대항전의 시대, 첨단 반도체 회사를 가진 것과 아닌 것은 큰 차이다. 그런 격동기에 삼성전자에 남은 반전의 시간은 5년 안쪽일 수 있다. 이재용 회장과 삼성전자의 배고픔과 절실함을 기대한다.

b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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