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2030] “궁금한게 끝나야 진료 끝나는 것” 감동의 ‘30분 소아과’

박상현 기자 2024. 5. 3.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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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일 서울의 한 대학병원 소아청소년과에서 어린이 환자와 보호자가 진료를 기다리고 있다. 2024.2.21/뉴스1

‘오픈런’은 명품 매장이나 맛집에서만 하는 게 아니다. 지난 1일 우리 동네 오래된 아파트 상가 안에 있는 소아과. 오전 8시 반에 문 여는 이곳에 1시간 넘게 일찍 도착했는데도 이미 30여 명이 줄 서 있었다. 줄 선 목적은 넉 달 뒤인 9월 영유아 건강검진을 예약하는 것. 오픈 시간이 가까워지자 급기야 120여 명까지 늘어난 대기자들이 상가 복도와 계단에 인간 똬리를 틀었다.

생후 14일부터 71개월까지 영유아는 나라에서 정한 시기에 따라 총 8번의 건강검진을 받는다. 성장·발달 이상이나 비만, 영아 돌연사 증후군, 시·청각 이상 등의 발달 사항을 체크하는 것이다. 영유아 건강검진은 아무 소아과에서나 받을 수 있다. 그런데도 유독 이 병원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건 ‘진료 시간’ 때문이다. 이 병원은 우리 동네 부모 사이에서 ‘30분 소아과’로 불린다. 영유아 검진 때 진료를 30분 이상 봐줘서다. 감기·복통 같은 일반 진료 때도 부모 질문이 끝날 때까지 봐준다. 환자나 보호자가 의사를 30분이나 붙들고 궁금한 걸 이것저것 물어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기에, ‘4개월 후 검진 예약’이 열리는 매달 1일 소아과 앞이 북적이는 것이다. 인터넷이나 앱(APP) 예약에 서툰 사람들도 있다며 굳이 줄을 서게 하는 것도 이런 진풍경의 이유다.

이 병원을 처음 찾은 건 지난 3월이었다. 생후 4~6개월 사이에 받아야 하는 2차 영유아 검진을 받았다. ‘30분 진료’에 대한 여러 후기를 보긴 했으나, 정말로 30분이나 시간을 할애해줄까 싶어 ‘꼭 물어봐야 하는 것’과 ‘시간이 남으면 물어볼 것’으로 질문지를 나눠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5분 동안 장난감으로 아이와 놀아주며 물건을 쥐는 동작이나 양손 사용, 소리 반응 같은 여러 발달 사항을 체크했다. 의사는 “이상 없이 잘 크고 있어요. 열심히 잘 키웠네”라며 웃었다.

진짜 진료는 이 다음부터 시작됐다. 토를 많이 하는데 원인이 뭔지, 분리 수면을 언제부터 해야 좋을지, 새벽 수유를 끊는 게 좋을지 등 우리 부부가 준비한 ‘필수 질문’ 10개를 끝내고 나니 이미 30분이 지나 있었다. 주춤거리다 “자꾸 여쭤봐서 죄송하다”면서 ‘추가 질문’으로 준비한 것도 다 던졌다. 의사는 “궁금한 게 끝나야 진료도 끝나는 것”이라며 질문 전부에 성심성의껏 답해줬다. 진료를 마치고 나오니 45분이 흘러있었다. 연신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한 뒤 병원을 나왔다.

“잘 산다는 것은 병원 갈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라는 말을 지인 의사에게 들은 적이 있다. 살면서 ‘어쩔 수 없는 순간’에 병원에 간다. 나 자신을 비롯해 사랑하는 사람들의 생명과 건강에 대한 판단과 선고를 내리는 ‘절대자’이기에 의사 앞에 서면 절로 위축되고 작아지는 기분이 든다. 명의(名醫)는 병을 잘 고치는 의사에게 붙는 수식어일 것이다. 우리 동네 ‘30분 소아과’ 의사의 의학적 성과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지만, 적어도 환자에게 감동을 준다는 면에선 ‘잘 듣고 잘 답해주는 의사’에게도 이 수식어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병원 문이 열리고, 줄 선 순서대로 예약이 시작됐다. ‘32번’이 적힌 종이를 받아 아이 인적 사항과 연락처를 적어 제출했다. 병원 문 밖에선 아직 제 차례가 다가오지 않은 엄마·아빠들이 혹 예약이 마감될까 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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