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천 원의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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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희 시인의 시를 읽고 웃은 적 있다.
시라고 하면 시공간이나 동식물, 사물에서 시작하기 쉬운데, 돈 얘기는 일상언어로도 좀 거북한데.
그 시집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지원을 받아 2012년 봄부터 여름까지 베를린자유대학 파견작가로 살며 쓴 시편들을 묶은 책인데, 절판되었다가 복간을 앞두고 있었다.
명절 연휴의 해변 시골 마을엔 인적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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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원에 사온 고추모종 심어놓고
주변과 나눌 생각에 벌써 행복해
내게 온 감사·행운 이젠 나눠볼까
김복희 시인의 시를 읽고 웃은 적 있다. 시라고 하면 시공간이나 동식물, 사물에서 시작하기 쉬운데, 돈 얘기는 일상언어로도 좀 거북한데.
지금 내 텃밭에는 연초록 고춧잎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라벤더도 몇 그루 있다. 화분의 식물을 죽인 적 많지만 호미로 땅 파서 모종을 심어본 건 처음이다. 해가 질 무렵, 물 주기를 잊지 말아야 한다. 고추가 많이 열리면 이웃 할머니들에게 나눠 드릴 것이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어쩌다가 내가 망망대해 마주한 채 절벽에 서 있는지. 얼마나 느닷없이 새로운 사건에 휘말렸는지. 정말 행운일까? 작년 추석 연휴였다. 그때 나는 시집 ‘베를린, 달렘의 노래’ 최종교정지를 가지고 친구의 세컨하우스에 와있었다. 그 시집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지원을 받아 2012년 봄부터 여름까지 베를린자유대학 파견작가로 살며 쓴 시편들을 묶은 책인데, 절판되었다가 복간을 앞두고 있었다.
교정지를 다 훑어보고 마지막으로 ‘개정판 시인의 말’을 썼다. “파도 소리 들린다. 죽은 줄 알았던 포도나무에서 포도가 열렸다고, 40년 지기 벗 지미(智美)가 마당에서 소리쳤다. 나는 친구네 거실에서 교정지를 보고 있다. 파묻혀 있던 시집이 세상에 나올 거라서.”라고.
후련한 기분으로 마당으로 나와 고양이와 놀고 있었다. 명절 연휴의 해변 시골 마을엔 인적 없었다. 저만치 한 노인이 다리를 절룩거리며 비탈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서너 걸음 옮기곤 앉았다가 다시 두어 걸음 옮기곤 땀을 닦길 연신 반복하던 노인이 홀연 담장 앞에 섰다. 산신령인 줄 알았다. “어르신, 잠시 쉬었다 가시겠어요? 미지근한 물 한 잔 드릴게요.” 나는 그를 부축하여 마당 모퉁이 의자에 앉게 했다. 가까이에서 본 노인은 소년처럼 눈빛이 맑고 두 뺨이 발갛고 목소리가 깨끗한 사람이었다. 물 대신 믹스커피 한 잔 줄 수 있냐고 물으셨다.
10여 년 비워뒀던 노인의 집에서 나는 살게 되었다. 이 마을에서 가장 작은 집인 듯하다. 평생 뱃일한 90대 노인, 절벽 꼭대기 옛집에 오갈 수 없어 나한테 싸게 넘겨주고 싶다던 노인은 딸이 살아와 자신을 부르는 줄 알았다며 내 손을 꼭 잡으셨다. 서른 넘어 죽은 자신의 딸과 내가 똑 닮았다며, 그 앤 너무 착해서 봉사하러 멀리도 다녔다는데, 난 안 그런데.
어떤 친구는 기적이라고 했고 어떤 친구는 내 삶에 터닝포인트가 찾아왔다고 했고 어떤 친구는 잘 알아보라고 했다. 4000만원이 어디 있냐고 내가 포기하려는데, 나와 30년 이상 알아 온 친구들이 의논해서 돈을 모아 집값의 절반을 채워줬다.
“나는 어떤 모종이었기에 어떤 흙에서도 자라지 못했을까?”(김다연, ‘고독은 나의 사(事)여서’)라고 읊조린 그의 첫 시집을 기다리며 혼자 벽 도배하고 장판도 새로 깔 것이다. 시집이든 집이든 짓거나 고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영화 ‘여행자의 필요’에서처럼 나는 이제 숲에서 피리 불고 바위 위에서 낮잠도 잘 것이다.
김이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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