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원 마감 11일 전 "자율 증원 허용"…정부 '자충수' 됐다
정부가 제시한 '의대 자율 증원' 결정이 자충수가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의사 단체는 물론 시민단체도 "2000명 증원 비과학적이라는 근거"라며 한목소리를 낸다. 법원은 이를 근거로 의대 증원 절차를 당분간 중단하라고 정부에 요청했다. 의사들의 휴진이 이어지는 가운데 의대 증원 절차를 서둘러 마무리 지으려던 정부의 계획에 차질이 예상되면서 의료공백 사태도 악화 일로를 걷고 있다.
2일 의료계와 법조계에 따르면 지난달 30일 서울고등법원 행정7부(부장판사 구회근)는 의대 교수, 의대생 등 18명이 제기한 '의대 증원' 집행정지 신청 항고심에서 정부에 의대 증원에 관한 일체의 자료를 오는 10일까지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이와 함께 자료를 제출, 검토하는 이달 중순까지 한국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에 입학정원 승인 절차를 중지하라고 요구했다.
이날 법원은 1심 재판부와 달리 정부가 증원 규모로 제시한 2000명의 추가 '근거 자료'를 교육부·보건복지부에 요청했다. 소송대리인인 이병철 변호사는 "재판부는 각 40개 대학에 (의대 정원을) 배분한 결정을 뒷받침하는 회의록, 특히 배정위원회 회의록과 명단 등 일체 자료를 제출하라고 구체적으로 요구했다"고 전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정부가 각 대학에 의대 정원 증원분을 50~100% 범위에서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한 점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애초 증원 숫자가 과학적이라면 이를 바꾸는 데도 뚜렷한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정부나 각 대학의 증원 조정이 너무 촉박하게 이뤄졌고 과정도 명확하지 않은 측면이 있어서다. 정부가 내년도에 한해 의대 정원을 자율적으로 조정하도록 허용한 것은 지난달 19일로, 대입전형 시행계획 마감일로부터 불과 11일 남은 때였다.
의료계는 지금까지 "과학적, 객관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의대 증원을 반대해왔다. 정부가 국립대 총장의 건의를 수용해 대학별 '의대 자율 증원'을 결정하자 비난 수위는 한층 거세졌다. 신찬수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 협회(KAMC) 이사장은 당시 머니투데이와 인터뷰에서 "국립대의 (의대 자율 증원을 요청한) 건의문 어디에도 왜 그런 제안을 했는지 이유가 없다"며 "의대 정원을 2000명 늘려야 한다는 정부의 주장이 과학적이지 않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라고 날을 세웠다. 김창수 전의교협 회장은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평가 절하했다.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 체제였던 대한의사협회도 "근본적인 해결 방법이 아니다"는 짧은 논평만을 남겼다.
심지어 의대 증원에 찬성 의견을 밝혀왔던 시민단체도 국립대가 외에 사립대는 정원 변동이 거의 없다는 점을 들며 "가짜 의료개혁 증표"라고 비판에 동참했다. 건강권실현을위한보건의료단체연합은 정부의 자율 증원 발표 후 입장문을 내고 "지역·필수 의료 공백 해결을 위해서는 정부 지원 체계에 놓여 있는 국공립대 의대 정원을 늘리고 이에 걸맞은 재정, 교육, 수련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며 "정부의 의료 개혁이 얼마나 시장 중심적이며 무계획적인 증원방안이었는지를 보여주는 핵심 증표"라고 거세게 반발했다.
법원의 결정에 따라 한동안 의료계의 대정부 비판 수위는 한층 거세질 것으로 전망된다. '강경파'로 분류되는 임현택 의협 회장은 2일 취임식에서 "의대 정원 자율 조정 2000명이라는 숫자가 아무런 근거조차 없음을 정부가 스스로 인정한 것"이라며 "과학적인 근거 제시를 통해 정부가 진행하고 있는 정책이 얼마나 잘못되었고, 나아가 한심한 정책인지 깨닫도록 하겠다"고 일갈했다. 전국의과대학 교수협의회(전의교협)도 법원의 결정에 대해 환영하면서 "정부가 제출한 자료 검토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 풀을 구성하고 검증 결과를 국민에게 공개할 것"이라고 가세했다. 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 학생협회(의대협)은 "정부에서 주장하는 근거를 국민들이 모두 확인해볼 기회"라며 의대 증원 '원점 재검토'에 대한 기대감을 내비쳤다.
의대 증원에 반발해 사직서 제출과 집단 휴진에 나선 의사들이 추가 투쟁 동력을 확보한 만큼 당분간 의료현장의 혼란은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서울대·세브란스병원이 지난달 30일 휴진한 데 이어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서울아산병원은 오는 3일 집단 휴진하고 의대 교수 대상의 비공개 긴급 세미나를 진행할 예정이다. 서울아산병원 측은 "예정된 진료와 수술은 변경해 환자 불편함은 최소화했다"고 밝혔다.
법원의 결정에 따라 내년도 정원은 물론 5년간 2000명씩 증원 계획이 사실상 백지화될 가능성이 제기되자 정부는 당혹스러워하는 분위기다. 심민철 교육부 인재정책기획관은 전날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브리핑 이후 기자들과 질의응답에서 "재판부가 정부 입장을 납득할 수 있도록 요청한 자료를 충실히 준비해 기한 내에 제출하겠다"며 "어떤 자료를 제출할 것인지는 답변할 수 없다. 결국 소송 결과를 지켜보는 게 맞지 않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정렬 기자 parkjr@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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