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세상이 한 나라보다 크길 원해

한겨레21 2024. 5. 2.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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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의 플레이리스트]정체성 찾아 한국에 돌아온 인권 변호사 케이티의 플레이리스트
케이티(왼쪽)와 할머니의 모습. 정성은 제공

나는 작가이자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다. 하지만 한국의 스탠드업 코미디 신에선 잘 활동하지 않는다. 인기가 없기 때문이다. 인기란 무엇인가. ‘기개’다. 씩씩한 기상과 굳은 절개. 한국어로 농담할 때면 나는 자주 씩씩함을 잃는다. 반면 영어로 할 땐 마음가짐부터 다르다. 어설픈 언어 탓에 대담해진다. 한국에서 여성으로 사는 것에 대해 농담하면 외국인들이 놀란다. 케이티(40)를 알게 된 것도 서울 용산 경리단길에서 열린 영어 스탠드업 코미디 무대에 선 날이었다.

“네가 제일 웃기더라.” 관객으로 온 그는 다른 코미디언이 들을까 작게 말했다. 남아메리카에서 왔단다. 그런데 한국어를 할 줄 아네? “어, 엄마는 한국인, 아빠는 영국 사람.” 정릉 할머니 댁에 머문다 하여 놀러 가기로 했는데 며칠 뒤 쫓겨났단다. “할아버지(96)가 식사시간에 안 왔다고 집에서 나가래.” 그래도 케이티의 조부모 사랑은 극진하다.

“나 호주 살았을 때 우리 할아버지가 아파서 병원에 오래 있었어. 내 생각에 죽을 거 같아. 그래서 나 비행기 타고 한국 왔어. 병원 들어갔어. 그런데 할아버지 나 보자마자, 너 왜 결혼 안 해? 얼굴 하얗게 화장 안 하니까 그렇지! 맨날 이런 거 혼나.” 4월의 어느 맑은 날, 정릉시장에서 만난 케이티는 발리 해변에서나 입을 법한 무지개색 원피스를 입은 채 “왜 한국 사람들 다 검은색 옷 입냐?” 묻는다. 남색 옷을 입은 나는 그저 웃을 뿐. 우린 할아버지가 외출한 틈을 타 몰래 할머니(89) 방으로 들어갔다.

“쟤 엄마는 스무 살에 호주로 가버렸어요. 잡지로 영국 남자랑 펜팔을 하더니 사랑에 빠졌다나. 그렇게 결혼하고 9개월 된 케이티를 나한테 맡겼어요. 장사하느라. 내가 동대문에서 액세서리 떼다 보내주면 호주에서 팔고 그랬어.” 4살까지 한국에서 자란 케이티는 그 후로 호주로 이주해 변호사가 됐고, 남아메리카 가이아나에서 원주민들의 권익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뉴욕(로스쿨)에서 정체성의 윤리에 관한 수업을 들었다. 그때 내가 한국인 정체성을 억압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한국에 대해 더 많은 걸 배우려고 노력 중이다.” 티시케이(TCK)라는 말이 있다. Third Culture Kids(제3문화 아이들)의 약자로 성장기에 2개 이상의 문화를 경험하며 자란 아이들을 뜻한다. 부모의 문화에도, 지역의 문화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 아이들은 세계와 충돌하며 자신만의 문화를 만들어간다. “그래서 낯선 문화 배우길 좋아한다. 내 세상이 한 나라보다 더 크길 원하기 때문이다.”

어디서든 타인에게 배우길 좋아하는 케이티는 마지막으로 할머니에게 물었다. “최선의 삶을 사는 방법에 대해 어떤 조언을 해주실 수 있나요?” 할머니가 “참한 신랑감을 만나야 한다”고 말하자, ‘그 얘기 말고 다른 거 해달라’고 했다. “몰라. 너무 아프니까 생각을 못해. 그냥 얼른 눈감는 게 편안해.” 케이티는 할머니를 껴안으며 말했다. “할머니 눈 못 감아요!”

“제가 왜 할머니를 사랑하는지 물으셨죠. 우리 가족 모두를 위해 그토록 많은 일을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할머니는 귀엽지 않아요. 사납죠. 그래서 강합니다.” 엄마와 할머니를 생각하면 그는 이 단어를 떠올린다. Resilience(회복력). 할머니 곁에서 회복력을 되찾은 그는 비행기를 네 번 갈아타고 가이아나로 떠났다.

정성은 비디오편의점 대표PD·<궁금한 건 당신> 저자

케이티 와이트먼(Katie Wightman)의 플레이리스트

The Personal Development School

https://www.youtube.com/@ThePersonalDevelopmentSchool

심리학자가 운영하는 채널로 ‘애착 이론’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합니다. 자신에 대해 더 알고 싶고 가까운 이들과 잘 지내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합니다.

영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나는 반대한다>https://youtu.be/xRdCeF6oB7M

미국 역사상 두 번째 여성 연방대법관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를 소재로 2018년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판사가 되기 전 그는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며 성차별에 반대하는 여러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영화 <리턴 투 서울>

https://youtu.be/rzjZPx_00MA?feature=shared

우연히 자신이 태어난 서울로 ‘리턴’한 프레디(박지민)가 어쩌다 한국 부모를 찾으면서 시작된 운명적인 여정을 담은 작품. 캄보디아계 프랑스인 데이비 추 감독의 신작으로, 나 역시 정체성을 찾으러 한국에 돌아왔기 때문에 재미있게 본 작품.

*남플리, 남들의 플레이리스트: 김수진 컬처디렉터와 정성은 비디오편의점 대표PD가 ‘지인’에게 유튜브 영상을 추천받아, 독자에게 다시 권하는 칼럼입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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