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나래의 ‘나혼산’ 바프 촬영, 기세와 독기의 여성 예능인 생존기[위근우의 리플레이]

위근우 칼럼니스트 2024. 5. 2. 09:5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여성 코미디언 박나래가 MBC 예능 <나 혼자 산다>에서 바디프로필을 촬영하고 있다. MBC 화면 캡처
여성 코미디언 박나래가 MBC 예능 <나 혼자 산다>에서 ‘나래Bar’를 공개하고 있다. MBC 화면 캡처

박나래의 대표 장르는 리얼리티쇼도, 토크쇼도, 공개 코미디도 아닌 기세다. 정확히는 기세의 장르화라 해도 되겠다. 지난해 여름 MBC <나 혼자 산다>(이하 <나혼산>)에서 “비키니는 기세”라는 명언을 남기며 수많은 시청자들의 지지를 받았던 그는, 최근 <나혼산>에선 ‘팜유즈’ 멤버인 전현무, 이장우와 함께 바디프로필 촬영에서 갈고 닦은 근육과 화면을 장악하는 기세로 셋 중 가장 인상적인 결과물을 남겼다. <나혼산>으로 최고의 예능인이 되기 전에도 그는 이미 tvN <코미디 빅리그>에서 패딩을 겹쳐 입고 이마를 넓힌 분장으로 마동석을 연기해내며 화제가 됐던 바 있다. 그의 키가 150㎝가 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살짝 비대칭으로 불량하게 뜬 눈으로 “마, 동석입니다”라고 뻔뻔하게 말하는 그는, 연기력도 연기력이지만 무엇보다 한 치의 민망함이나 어색함 없는 자기 확신의 기세로 마동석으로서의 존재감을 납득시켰다. 데뷔 초부터 공개코미디에서의 흔한 여성 외모비하 개그 출연자 정도로 소비되던 그가 마동석 분장으로 화제성을 얻고, MBC <라디오스타>에 출연해 나래Bar에 초대하고 싶은 MC로 김국진을 꼽으며 “더럽히고 싶은 첫눈 같은 남자”라는 이유를 들어 소위 레전드 회차를 만들어 낸 뒤, 바로 그 나래Bar의 과한 콘셉트를 과시적으로 공개하고 <나혼산>에 합류해 나래Bar를 멤버 친목의 장으로 확대하면서 프로그램의 중추에 서기까지의 입지전적 과정을 기세의 승리로 설명할 수도 있겠다. 그는 이번 바디프로필 촬영에 대해 욕심, 오기, 독기, 깡이 필요했다고 했지만 실은 그 스스로 대세 방송인이 되기까지 필요했던 게 오기와 깡이었다.

견갑에 숨길 수 없이 새겨진 지난 4개월 간 치열한 운동의 흔적처럼, 박나래의 경력에는 생존과 성공을 위해 아득바득 버티고 발버둥친 자국들이 곳곳에 박혀 있다. 처음부터 완성형 스타였던 이영자나 콩트 연기의 천재인 강유미와 김신영 같은 당대의 재능들조차 남성 대비 충분한 기회를 얻지 못하는 것이 한국 예능의 현실이다. 박나래는 그들과도 달랐다. 수많은 스타 개그맨을 배출한 KBS <개그콘서트>의 전성기에도 주역이 아니었으며, 과감히 망가져도 비호감으로 찍히기 일쑤였다. 뭐라도 달라질까 싶어 성형도 해봤지만 크게 바뀌는 건 없었다. 그러자 성형에 대한 자조적 개그를 했다. 예능인의 기세란 거의 대부분 많은 기회와 호의적 반응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것이 허용되지 않자, 박나래는 아예 스스로 기세를 연기, 연출해냈다. 데뷔 10년 만에 대세론을 타고 전성기를 맞이한 2015년, 장도연과 함께 출연한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선 썩 호의적이지 않은 실시간 댓글과 아슬아슬한 수위에 대한 제작진의 만류에도 첫 출연이 ‘막방’이 될 거라며 자신의 스타일을 밀어붙였다. 그 기세는 자신감의 여유로운 발로라기보다는 차라리 여기서 밀리면 끝이라는 배수진에 가깝다. <라디오스타>에서 단 한 회 동안 자신의 주사와 짝사랑하던 동료 양세찬에게 굴욕적으로 거절당하던 사연, 나래Bar가 불법 도우미 업소로 오해받아 신고 받은 에피소드까지 싹 다 쏟아내던 것도 마찬가지다. 토크 내용도 독하지만 정말 독한 건 정극 연기와 콩트 연기 차이를 보여주겠다며 자청해서 기꺼이 김구라에게 물세례를 받아 분량을 확보해내는 적극성이다.

이제는 둘을 떨어뜨려 생각하기 어려운 <나혼산>과의 관계도 돌이켜보면 생존의 과정에 가깝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더더욱 남성 호모소셜(남성 세계에서 배타적으로 유지되는 남성 간 연대적 관계)이던 프로그램 분위기 안에서 때로는 나래Bar의 주인장, 때로는 남성 출연자들의 ‘썸녀’ 콘셉트, 때로는 섹슈얼한 긴장감을 모두 제거한 무성적인 가족 역할을 수행하며 자기 자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나혼산>의 많은 남성 간 관계가 하다못해 지저분한 위생 관념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호형호제, 도원결의 등의 말로 자연스럽게 맺어진다면, 박나래에겐 그 모든 관계가 당연한 것 하나 없는 고군분투의 결과다. 여성, 특히 여성 코미디언이 생존하기 어려운 한국 예능의 생태에서 박나래의 성공기는 그래서 엄혹한 생존기다. 가령 결별 이슈로 전현무와 한혜진이 동시 하차한 2019년 <나혼산>에서 MC 역할을 맡아 프로그램을 이끌면서 그해 MBC 방송연예대상을 수상했지만, 상황만 따지면 영예로운 승진보다는 유리절벽에 가까웠던 게 사실이다. 그는 강한 기세로 자신이 방송을 장악하고 있다는 존재감을 시청자들에게 납득시키지만, 또한 자신의 노력이 행여 기준에 미치지 못할까봐 안절부절 못한다. 대상을 탄 뒤 상을 꼭 받고 싶었다고 말하며 엉엉 울던 모습과 이번 바디프로필 촬영에서 성공적인 결과물이 나온 것을 보고 스튜디오에서 결국 눈물을 보인 순간은 데칼코마니처럼 포개진다. ‘팜유즈’의 다른 두 남성 멤버가 여유로운 반면 그동안 가장 열심히 땀 흘렸던 그는 안절부절 못하고 마지막까지 근육을 쥐어짜 펌핑을 하며 그렇게 나온 첫 사진에 눈물을 보이고야 만다. 누구보다 노력하면서도 스스로에 대한 못 미더움과도 싸워내야 하는 이중의 전투. 노력이 배반당할 두려움을 숨기고 최선의 결과가 증명될 때까지 버텨내는 것이 그의 독기고 깡이다.

여성 코미디언 박나래의 스탠드업 코미디쇼 <박나래의 농염주의보>의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물론 기괴할 정도의 분장쇼와 19금 ‘섹드립’ 등으로 오늘만 사는 개그를 시도하던 시절의 독기와 비교해 대상 수상 이후의 박나래는 훨씬 여유로워 보이고, 대중적 이미지도 무난한 호감형으로 정착됐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손님들에게 후했지만, 초대한 남자를 유혹해보려는 콘셉트의 나래Bar 주인장 이미지는 목포 출신의 손맛 좋고 인심 좋은 고향 선배의 이미지로 변모했다. 재밌지만 시한폭탄 같던 게스트에서 다양한 포맷에서 진행 가능한 MC가 되며 채널 곳곳을 누빈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도 여전히 그의 성공기는 엄혹한 생존기다. 대상을 타던 그해, 박나래는 자신의 19금 ‘섹드립’ 캐릭터를 살려 지상파에선 보여줄 수 없는 내용을 담은 넷플릭스 스탠드업 코미디 <박나래의 농염주의보>를 선보이며 한국 여성 예능의 범위를 넓히는데 기여했다. 그 기세를 그대로 밀어붙일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여성 코미디언을 향한 이중잣대는 여전히 강고했다. 키즈 유튜버 헤이지니의 동심 콘텐츠와 본인의 19금 토크의 충격적 만남을 콘셉트로 한 유튜브 프로그램 <헤이나래>에서 몇몇 ‘섹드립’이 논란이 됐고, 심지어 남성에 대한 성희롱 혐의까지 덧씌워졌다. 피해자도 불분명한 성희롱 논란이었지만, 오빠가 허락한 19금을 벗어난 박나래에 대해 일부 대중은 괘씸죄를 적용했다. 그는 <나혼산>에서 할아버지를 만나 후회의 눈물을 쏟고 나서야 논란을 털 수 있었다. 대중을 위해선 어떤 짓도 부끄러움 없이 해내야 해, 대신 나대지는 마. 이것이 여성 예능인에게 주어진 모순적 과제고, 박나래는 그 모순을 가장 적극적으로 겪어낸 생존자다.

바디프로필을 찍고 자신의 지난 4개월의 독한 노력을 돌아보던 박나래의 눈물이 안쓰럽고 존경스럽고 사랑스러우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편치 않은 건 그래서다. 자기 잘못도 아닌 성대 수술로 인한 운동 공백기를 자책하고, 그토록 노력해서 근육을 만들었음에도 결과물이 안 좋을까봐 안절부절 못하는 그의 태도엔 그가 생존을 위해 충족해야 했던 이중적 기준의 흔적이 남아있다. 독하게 노력해서 사랑받되, 자신이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인지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한없이 여린 모습 역시 증명해야 한다. 남성도 노력하지 않으면 초심을 잃었다는 평가를 받지만, 여성은 노력한 만큼의 몫을 당당히 요구하는 것만으로도 건방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가 독기 있게 아득바득 정상에 올라온 입지전적 여성이라면 더더욱. 그토록 좁은 문을 통과해 대중적인 사랑을 받게 된 박나래가 대단한 게 사실인 만큼, 그에게 적용되는 사랑 받을 기준이 부조리한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박나래에 대한 응원과 지지가 그가 장애물을 극복해온 과정에 대한 긍정으로 환원되지 않길 바란다. 그의 눈물에서 진정성을 발견하고 더 사랑하게 되는 만큼, 울 필요 없고 더 뻔뻔하게 자기 몫을 요구하라고 말해주면 좋겠다. 박나래는 개인의 기세로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이제 더 많은 이들의 기세가, 변화를 요구하는 기세가 아닌 이미 세상이 변했다는 기세가 필요하다.

위근우 칼럼니스트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