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세습은 北몰락 징후… 김정은 신격화, 체제불안 극복 ‘고육지책’[Deep Read]

2024. 5. 2.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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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준의 Deep Read - 김정은 ‘독자적 우상화’ 배경
‘태양절·광명성절 명칭 폐지’ 先代 격하… 사회경제 위기·국내외 불안정성 관점서 분석해야
지배체제 공고화·후속 세습체계 확립이 목표… ‘외부 정보’ 적극 주입이 앙시앵레짐 타파 첩경

북한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에 대한 우상화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 선대 김정일 위원장은 신격화한 김일성의 후광 아래서 정권을 유지했던 반면, 김정은은 자신을 스스로 우상화하면서 이를 위해 김일성·김정일의 우상화를 격하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 모습이다.

김정은 체제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도전들을 감안할 때, 북한의 이런 움직임은 단순한 ‘체제 공고화’ 차원을 넘어 체제의 취약성과 불안정성을 극복하기 위한 ‘고육지책’의 성격을 띤다. 북한이 현시점에서 뜬금없이 보여주는 김정은 우상화 열풍의 배경과 추이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권력 신격화의 역사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절대권력을 추구했던 왕들은 자신에 대한 신격화에 열을 올렸다. 범접할 수 없는 신이 되는 게 우매한 백성을 통치하거나 도전자의 출현을 막는 데 유리했기 때문이다. 고대 페르시아의 왕도 이집트의 파라오도 신으로서 백성을 지배했다.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파라오였던 클레오파트라도 신으로 군림했으나, 사실 그 시조는 알렉산더 대왕 휘하의 마케도니아 장군이었을 뿐이다.

기원전 5세기에 왕정을 폐지하고 원로원이 지배하는 공화정 시대를 연 로마는 권력의 사유화를 막고자 임기 1년의 집정관 2명을 매년 원로원에서 선출하는 고도의 권력 분산 체제를 500년간 유지했다. 갈리아 정복으로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종신독재관에 취임해 영구집권을 도모하자 원로원의 공화파 의원들은 그를 암살했고, 카이사르의 이름과 재산을 상속한 양자 옥타비아누스는 이들을 토벌한 후 카이사르를 신격화하고 신격 카이사르의 이름으로 초대 황제에 올랐다.

그 후 모든 로마 황제는 정통성의 상징으로 신격 카이사르의 이름을 물려받아 통치했고, 자식이 없거나 혹은 있더라도 부실하면 명망 있는 장군을 양자로 영입해 카이사르의 이름으로 제위를 상속했다. 이 체제는 로마제국을 장기간 강성하게 했으나, 후대에 이 전통이 사라지고 제위가 자식에게 ‘세습’되면서 로마의 쇠퇴가 시작됐다. 즉 권력 세습은 권력 몰락의 징후다. 말기에 군사력으로 황위를 찬탈하는 사례가 발생하자, 황제의 신격도 정통성도 사라졌다. 이는 북한의 세습체제와 관련해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공산국의 지도자 우상화

무신론이 지배하는 공산국가에는 신이 존재할 수 없으나, 구소련 공산당은 혁명 지도자 레닌이 사망하자 그를 신의 수준으로 우상화했고, 그의 유해를 공산당 지배체제 정통성의 상징물로 이집트 파라오처럼 박제화해 전시했다. 그러자 중국·베트남·북한 공산당도 그 선례를 따랐고, 그 후계자들은 지금도 전시되고 있는 영원불멸의 혁명지도자로부터 정통성을 빌려 백성을 지배하고 있다. 이를 폐기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소련의 후신 러시아뿐이다.

공산국가의 지도자 우상화 중에서도 단연 압권은 북한이다. 다른 나라들의 지도자 우상화가 사망 후 상징적 정통성 유지의 차원에서 이뤄진 반면, 북한의 지도자 우상화는 모두 생존 때부터 일찌감치 시작됐고, 정치적 우상화의 수준을 넘어 김일성 왕조의 항구적 세습체제 유지에 초점이 맞춰진 신정국가 체제의 정착이 주된 목적이었다.

북한은 전 주민이 수년간 먹고살 만한 돈을 들여 북한 전역에 수만 개의 김일성·김정일 동상을 설치했고, 부족한 전기를 긁어모아 동상들 주변을 밤에도 대낮처럼 밝히고 있다. 그처럼 국가 자원을 총동원해 진행해 온 우상화의 효과는 상상 이상으로 심대하다.

북한 정권이 싫어 10여 년 전 목숨 걸고 탈출한 한 탈북 지인은 “지금도 한국 언론에 뉴스로 등장하는 김일성·김정일의 사진을 보면 나도 모르게 연민의 눈물이 나온다”고 말하고 있다. 수십 년간 이뤄진 최고 존엄에 대한 신격화 공작 속에서 이들에 대한 추앙과 숭배심리가 배태된 것으로 분석된다.

◇김정은의 속사정

김정은이 집권 초기에 제일 먼저 했던 일 중 하나는 정통적 권력 승계자 자격으로 김정일을 금수산태양궁전에 신격화해 안치하고 만수대의 25m 높이 김일성 동상 옆에 나란히 김정일 동상을 세운 일이었다. 이처럼 김정은은 이미 우상화가 완료된 김일성·김정일의 후광에 기대어 권력 기반을 닦았다.

그러던 김정은이 최근엔 김일성·김정일 우상화를 격하하면서 자신을 ‘태양’으로 칭하는 빈도를 늘리는 등 독자적 우상화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하늘의 태양이 둘이 될 수는 없으므로, 김정은은 스스로 ‘태양’의 지위에 오른 이래 김일성 생일에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하지 않고 있고, 김일성 생일인 ‘태양절’과 김정일 생일인 ‘광명성절’의 명칭마저 폐지했다.

김일성·김정일의 후광에서 벗어나 독자적 우상화 위상을 확립하려는 김정은의 노력은 그가 직면한 국내외적 체제 불안의 관점에서 분석돼야 한다. 유사시 후계체제의 불확실성, 점증하는 주민의 불신과 불복종 풍토, 핵무장 성공과는 별개로 진행되는 고도의 경제난, 남북한 국력 격차 확대에 따른 좌절과 두려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이는 북한이 지난해 말 천명한 대남 통일정책의 폐기와 더불어 현 상황의 타파를 위한 고육지책의 일환으로 보인다.

김정은이 우상화 작업을 통해 달성하려는 궁극적인 목표는 지배체제 공고화와 후속 세습체제 확립이다. 특히 세습체제는 김정은이 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면서 핵무장 강화와 대남·대미 전략에 몰두하는 데 필요한 불가결한 조건이다. 김정은이 벌써부터 어린 딸을 전면에 내세워 후계체제의 시동을 거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상화 타파의 첩경

북한의 지배구조와 후계체제가 정상적으로 작동되는 한 북한은 정치적 변화를 추구할 이유가 없고, 따라서 레짐 체인지(체제 변혁)도, 개혁·개방도, 비핵화도, 통일도 기대할 수 없다. 북한의 변화는 현행 일당독재 체제와 세습체제가 붕괴하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

북의 우상 숭배·세습체제가 존립하기 위한 필수요건은 지배구조와 사회를 교란시킬 수 있는 외부 정보에 대한 철저한 통제다. 북한이 외부 정보에 노출되는 순간 현재의 기형적 정치체제는 더 이상 생존할 수 없게 된다. 한국 정부가 북한의 진정한 변화와 비핵화, 통일 지향적 남북관계 진전을 원한다면 북한에 앙시앵레짐을 깨는 외부 정보를 적극 주입하는 일부터 착수해야 한다. 대북방송, 대북전단, 휴전선 확성기방송 등은 북한의 핵무기에 맞먹는 파괴력을 지닌 대한민국의 대북 무기이자 정책 도구다.

세종연구소 이사장· 전 외교부 북핵대사

■ 용어설명

‘신격화’는 신격이 없는 인간이 신과 같은 수준까지 올라가는 것 또는 그런 작업. 고대 중동·그리스·로마·중국 등에서 시작돼 현대 북한에 이르기까지 황제(최고권력)에 대한 숭배로 구현.

‘외부 정보’는 세계시민의 기본권. 세계인권선언 제19조는 모든 사람은 의견·표현의 자유를 가지며, 이는 국경과 관계없이 어떤 매체를 통해서도 취득·전달할 수 있는 자유를 포함한다고 규정.

■ 세줄요약

권력 신격화의 역사 : 고대 로마에서 황제 제위가 자식에게 ‘세습’되면서 쇠퇴가 시작. 권력 세습은 권력 몰락의 징후. 황위를 찬탈하는 사례가 발생하자 황제의 신격도 사라진 건 북한 세습체제와 관련해 시사점을 던져.

김정은의 속사정 : 북한 정권의 초기 우상화는 김일성 왕조의 항구적 세습체제 유지와 신정국가 정착이 주된 목적. 김정은이 선대 우상화를 격하하고 자신에 대한 신격화에 나선 건 국내외적 체제 불안에 따른 고육지책.

우상화 타파의 길 : 북한의 지배·세습 체제는 ‘외부 정보’에 노출되는 순간 그 기형성을 유지할 수 없게 돼. 대북방송과 전단, 휴전선 확성기방송 등 정책 도구를 동원해 북의 앙시앵레짐을 깨는 외부 정보 주입이 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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