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히 있지만 '없는 아이들'…그들에게 남은 마지막 한 달 [스프]

김혜영 기자 2024. 5. 2. 09:0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더 스피커] 국회 처리 시한 한 달 남은 '보편적 출생등록제'


지난해 9월 부산 동구의 한 병원에서 1.3kg의 외국인 남자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신장을 하나만 품고 태어난 A 군은 생후 2개월간 중환자실에서 위험한 고비를 넘겨야 했습니다. 그사이 미등록 외국인 부모와의 생이별도 겪었습니다. 어머니가 출산 이틀 뒤 "병원비를 벌어오겠다"며 퇴원한 후, A 군의 아버지인 남자친구와 원래 살던 곳으로 출국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부산 일신기독병원 의료진이 열어준 백일상. 사진 : 부산 동구 제공·연합뉴스


A 군은 하루 아침에 고아 신세가 됐지만, 지자체와 병원, 복지기관의 적극적인 협조로 따뜻한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부산 동구 공무원들의 적확한 업무 처리 덕분에 병원 진료도 제대로 받을 수 있게 됐고, 병원 간호사들의 깊은 배려 덕분에 지난해 12월에는 한복 차림으로 백일 기념 사진도 찍었습니다. 지금은 장애 영유아들을 위한 재활원에서 보살핌을 받고 있습니다. 생후 6개월을 갓 지난 지금도 복합 장애로 대학병원 진료를 계속 받아야 하지만 그래도 많은 이들의 선의와 도움 속에 힘겹게, 조금씩 크고 있습니다.

A 군은 몸은 좀 불편할지 몰라도 분명 우리 곁에 존재하는 아이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행정 체계상에서는 태어난 적도 없고, 그래서 존재하지도 않는 '그림자 아동'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요?
 

있지만 없는 아이…여전한 사각지대 '미등록 외국인 아동'

최근 수년간 출생 미신고 '그림자 아동'의 유기, 방치, 사망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출생 등록 문제에 대한 관심이 커졌습니다. 그 결과 10년 넘게 지지부진하던 출생통보제 관련 법안이 지난해 6월 국회에서 통과됐지만, 외국인 아동들은 그 법안에서 제외됐습니다. 현행법에서 출생 신고 대상은 국민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고, 한국에서 태어난 외국인 아동의 출생을 확인하는 제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외국인 아동의 출생 등록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출생 등록은 본국 정부에 하고, 우리 정부에는 외국인 등록을 하도록 요구하고 있는데, 문제는 이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는 데 있습니다. 가령, 난민이나 미등록 이주자의 경우에는 본국 정부의 행정 지원을 당연히 받기 어렵습니다. 특히 출신국 정부의 정치적·종교적 박해를 피해서 온 난민들은 출신국 대사관에 방문한 것만으로도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출신국 출생 신고를 꺼리거나 아예 신고 자체를 못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로는 출신국 정부가 일부러 출생 등록을 안 받아주기도 합니다. 자국민 미등록자를 줄이기 위한 압박으로 출생 등록 같은 행정 지원에 비협조적이거나 거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결국, '있지만 없다'는 모순 속에 살아가는 A 군과 같은 아이들은 그 규모조차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감사원과 법무부는 3~4천 명 정도로, 국가인권위원회 등은 약 2만 명으로 추정한 바 있습니다. 우리 행정 체계상에 잡히지 않는 아이들을 파악하려니 이렇게 기관마다 차이가 나는 건 당연한 결과일 수밖에 없습니다.
 
정익중ㅣ아동권리보장원장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우리나라가 지금 아시아에서 최초로 다민족, 다문화 국가가 되었습니다. 인구의 5%가 다민족, 다문화인 국가가 된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만 출생통보제의 대상이 되도록 했기 때문에, 많은 외국인 아동들이 누락될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감사원이 조사했던 미등록 아동 전체 6천여 명 중 4천여 명이 외국인 아동이었습니다. 이 얘기는 (한국인) 95%에서 2천 명, (외국인) 5%에서 4천 명이기 때문에, 곧 외국인 아동이 미등록될 확률이 40배가 넘는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아이들을 포함한 보편적 출생등록제가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림자 아동'이 살아내야 할 현실

그럼 A 군과 같은 미등록 외국인 아동들, '그림자 아동들'이 앞으로 겪어내야 할 현실은 어떤 것들일까요. 국내에서 정규 교육을 받을 수 있다 해도,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기본적인 인권은 제대로 보장받지 못합니다. 우선 본인 인증을 하지 못해 휴대전화 가입도, 통장 개설도 하지 못합니다. 보험 가입이 안 돼 병원비 부담이 크니, 아파도 참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공부나 운동 등 자신의 잠재력을 보여줄 수 있는 분야의 각종 대회 출전이나 자격증 시험은 물론이고, 현장학습 신청조차 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영아 매매나 불법 입양 등의 위험에 노출될 우려가 큰데, 설령 이런 의심 정황이 포착된다 해도 서류상 '없는 아이'이기 때문에 신속하고 적확한 도움을 받기가 어렵습니다. 1989년 유엔 인권위원회 <일반논평>도 "출생 직후 의무적으로 출생 등록되어야 한다는 것의 주목적은 아동의 납치, 노예, 매매, 또는 협약에 명시된 권리를 온전히 향유할 원칙에 어긋나는 기타 부적절한 대우가 발생할 위험을 감소시킴에 있다"고 명시한 바 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연령과 친부모 등 신원을 확인할 수 없으니 성인과 다른 사법 절차(소년사법)를 적용받을 권리, 전쟁 상황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 가능한 한 친부모를 알고 친부모와 함께 살 아동의 기본적인 권리도 보장받을 수가 없습니다.
 

국제사회 지적 받은 지 1n년차…이젠 바뀌어야

국제사회는 아동이 출생한 이후 즉시 등록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본 중의 기본 원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아동 인권에 관한 가장 보편적인 국제 인권 규범인 유엔 아동권리협약도 '모든 아동이 태어난 즉시 출생 등록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1991년 이 협약에 비준했는데, 그로부터 33년이 지난 지금도 그 기본 원칙은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보다 못한 여러 국제기구들이 한국에 우려의 목소리를 내왔습니다. 그 기간만도 10년이 넘었습니다. 유엔 아동권리위원회는 2011년과 2019년, 부모의 법적 지위 또는 출신지와 관계없이 모든 아동이 출생 신고를 보편적으로 이용 가능하도록 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2012년과 2018년에, 자유권규약위원회는 2015년에,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2018년에, 유엔 인권이사회와 자유권규약위원회는 지난해에 각각 한국에 존재하는 모든 아동들의 출생 등록을 잇달아 권고했습니다.

대법원도 2020년 결정을 통해, 헌법재판소도 지난해 3월 결정을 통해 아동의 출생 등록될 권리가 보편적인 기본권임을 재확인한 바 있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김혜영 기자 khy@sbs.co.kr

Copyright ©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