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여왕〉, K드라마가 사랑한 재벌 [K콘텐츠의 순간들]

김선영 2024. 5. 2. 0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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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드라마에서 ‘재벌 캐릭터’는 드라마의 필수 요소처럼 되어버렸다. 올해는 재벌이 나오지 않는 작품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화제작 〈눈물의 여왕〉은 재벌 미화 수준에까지 이른다.

※드라마 〈눈물의 여왕〉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SBS 드라마 〈재벌X형사〉의 한 장면. 재벌이 정의 실현 히어로로 그려진다. ⓒSBS 제공

K드라마에서 ‘재벌’은 이제 필수 요소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의 재벌 캐릭터는 신데렐라 스토리, 복수극, 사회극 등 특정 장르군에 주로 등장했으나, 요즘에는 재벌이 나오지 않는 작품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올해 1분기만 해도 〈열녀 박씨 계약결혼뎐〉(MBC), 〈마이 데몬〉(SBS), 〈내 남편과 결혼해줘〉(tvN), 〈재벌X형사〉(SBS), 〈멱살 한번 잡힙시다〉(KBS), 〈로열 로더〉(디즈니플러스), 〈피라미드 게임〉(티빙), 〈웨딩 임파서블〉(tvN), 〈눈물의 여왕〉(tvN) 등 재벌이 주요 인물로 등장한 작품이 10여 편에 이른다. 그나마도 연속극은 제외한 수치다.

단순히 수치적 증가만이 아니라 재벌 캐릭터의 새로운 묘사도 눈에 띈다. 수사물인 〈재벌X형사〉가 대표적이다. 흔히 수사물 속 재벌은 주인공과 대립하는 사회악이자 빌런으로 그려져왔으나, 〈재벌X형사〉 속 재벌은 반대로 정의 실현을 하는 히어로로 그려진다. ‘돈에는 돈, 빽에는 빽을 외치는 플렉스 수사기’를 표방하는 이 드라마에서 재벌 3세 주인공 진이수(안보현)는 부와 권력을 이용해 사건을 해결한다. 보통의 형사들은 입장하기조차 힘든 VIP 전용구역을 진이수는 자유롭게 넘나들고, 사비로 상금을 내걸어 단서를 얻어내는 과정이 영웅 활극처럼 유쾌하게 묘사된다. 물질만능주의에 대해 아무런 비판적 거리가 없고, 오히려 부의 과시가 핵심 관전 포인트가 되는 것, 요즘의 K드라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재벌 소재 드라마의 최근 경향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 하나 더 있다. 현재 방송가에서 가장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는 드라마 〈눈물의 여왕〉이다. 〈별에서 온 그대〉(SBS), 〈사랑의 불시착〉(tvN) 등으로 글로벌 흥행 작가가 된 박지은 작가가 극본을 쓰고, 김수현과 김지원 등 톱 배우가 주연을 맡은 〈눈물의 여왕〉은 방영 전부터 올해 최고의 기대작으로 꼽혔다. 실제로도 tvN 역대 드라마 시청률 1위 기록을 경신할 전망이고, 넷플릭스 글로벌 비영어권 TV 시청 순위 1위를 기록하는 등 높은 인기를 모으고 있다. 코미디와 비극을 절묘하게 오가는 스토리에 배우들의 열연, 감각적인 연출이 더해져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는 작품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마냥 재미있게 보기에는 불편한 지점이 많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재벌가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로맨스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눈물의 여왕〉에서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퀸즈그룹이라는 재벌가 이야기다. 창업주 홍만대 회장(김갑수)은 ‘명동 뒷골목 구두닦이 소년에서 굴지의 대기업을 일궈낸 신화적 주인공’으로 묘사된다. 유통업계의 강자인 퀸즈그룹은 극 중 국내 재계 순위 10위에 올라 있다. 홍 회장의 뒤를 이어 그룹을 이끌어갈 후계자 1순위로는 손녀 홍해인(김지원)이 손꼽힌다. 전형적 엘리트 경영 코스를 밟은 홍해인은 퀸즈백화점을 유통업계의 제왕으로 만들고자 한다. 퀸즈그룹의 역사는 자수성가한 창업주 시대에서, 부의 세습이 이뤄진 재벌 2세 시대를 지나, 부의 영속을 꿈꾸는 재벌 3세 시대로 돌입한 국내 재벌사를 그대로 보여준다.

K드라마의 문제적 ‘chaebol(재벌)’

드라마의 핵심 갈등은 바로 이 재벌 3세 경영 시대를 눈앞에 두고 일어난다. 홍해인이 급작스럽게 시한부를 선고받고, 때마침 퀸즈그룹 오너가의 경영권에도 위기가 찾아오면서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된다. 경영권을 위협하는 세력은 홍만대 회장의 동거인 모슬희(이미숙)와 그 일당이다. 퀸즈그룹을 손에 넣기 위해 무려 30년 동안 큰 그림을 그려온 모슬희는 친자 윤은성(박성훈), 윤은성의 보육원 동기 천다혜(이주빈)의 신분을 위조해 퀸즈가에 입성시킨다. 이 같은 위조와 잠입 과정이 영화 〈기생충〉을 연상시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문제는 〈기생충〉과 달리, 이 드라마의 시점이 철저히 재벌가 중심이라는 데 있다. 모슬희는 30년 동안이나 퀸즈가의 도우미 취급을 받으며 홍 회장에게 서비스 노동을 제공해왔음에도 잔혹한 악역으로만 그려지고, 퀸즈가는 어리석지만 순진한 피해자로만 묘사된다. 〈눈물의 여왕〉은 마치 〈기생충〉을 박 사장(이선균) 입장에 이입해서 다시 쓴 드라마처럼 보인다.

tvN 드라마 〈눈물의 여왕〉의 한 장면. 퀸즈그룹 재벌가 이야기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tvN 제공

이 같은 태도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홍만대 회장의 비자금 에피소드다. 드라마 후반부에서 홍 회장이 은닉한 비자금 9000억원은 퀸즈그룹 경영권 분쟁의 결정적 변수로 떠오른다. 경영권을 손에 넣은 윤은성은 오너가에 대한 동정적 여론을 반전시키기 위해 비자금의 실체를 밝히려 하고, 퀸즈가는 그보다 먼저 비자금을 찾고자 한다. 홍만대는 이미 과거에도 횡령 혐의로 구속된 전적이 있기에, 복잡한 돈세탁을 거친 비자금 역시 탈세와 관련됐을 확률이 있다. 그러나 드라마는 이를 전혀 문제 삼지 않는다. 가령 11화에서 퀸즈그룹 법무이사였던 백현우(김수현)는 비자금의 실체를 밝히는 데 도움을 준 회사 직원들을 언급한다. “평생 몸 바쳐온 회사를 위해, 더 이상 회사가 망가져가는 것을 보기 힘들어서” 자발적으로 정보를 제공했다는 직원들의 이야기는 흡사 미담처럼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는 ‘재벌(chaebol)’이라는 말 자체가 등재돼 있다. 재벌은 단순한 대기업과 달리 특정 가족이 경영권을 쥐고 세습하며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한국적 현상으로 인식된다. 재벌가의 혈연 세습을 즐겨 다루는 K드라마는 오래전부터 이 문제적 상황을 정당화하는 데 일조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눈물의 여왕〉은 여기서 더 나아가 미화 수준까지 이른 작품으로 기억될 듯하다.

김선영 (칼럼니스트)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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