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칼럼] 호모 사피엔스의 바다

김종희 문화공간 빈빈 대표 2024. 5. 2.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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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 의미, 관계 속 성장
우리 종착점은 결국 바다…생물들 경쟁하면서 공존, 불편한 진실 외면땐 공멸
김종희 문화공간 빈빈 대표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간 것은 사과, 사과는 맛있다. 맛있는 건 바나나, 바나나는 길다. 긴 것은 기차, 기차는 빠르다. 빠른 것은 비행기, 비행기는 높다. 높은 것은 하늘, 하늘은 푸르다. 푸른 것은 바다….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그면… 파란 하늘빛 물이 들지요 어여쁜 초록빛 손이 되지요.

어린 날의 놀이다. 호모 루덴스. 놀이의 인간은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 놀이는 단지 놀이라는 행위로 끝나는 것만은 아니다. 놀이의 즐거움은 관계의 발견에 있다. 흩어져 아무렇게나 발부리에 채는 사금파리도 놀이 속으로 들어오면 귀한 물건이 됐다. 가질 수 없었던 저것이 내게로 와 이것이 되며, 버려진 돌이 사용가치 높은 그릇이 되는 것이다. 저것이 이것이 되는 것은 소유라는 개념을 안고 있으며, 그릇이 된 돌은 쓸모없음의 쓸모를 발견하는 일이다. 놀이는 대상으로 있던 것이 의미로 바뀌는 순간을 숱하게 경험케 했다.

원숭이 엉덩이부터 바다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상황은 동물에서 식물로, 육지에서 바다로, 자연에서 과학 기술로 확장됐다. 원숭이는 인간과 같은 영장류 유인원이다. 그러나 영화 ‘혹성탈출’에서 만나는 원숭이는 인간의 세계를 지배한다. 세상의 주인이 바뀐 것이다. 진화한 유인원과 퇴화된 인간들이 살아가는 땅. 신적인 존재처럼 인식한 인류의 시대가 끝나고 말았다.

말 잇기 놀이의 전개는 연상을 통해 새로운 대상을 발견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지평을 확장한다. 놀이에 담긴 의미는 관계 속의 성장이다. 아울러 우리의 종착점은 높은 하늘이 아니라 결국 바다다. 강물이 바다로 흘러드는 것은 강바닥보다 바다의 바닥이 낮기 때문이다. 낮은 곳으로 모인 지구의 물은 바다가 되는 순간 강물로 불렸던 과거의 이름을 내려놓는다. 바닷물이 되는 순간 이전의 ‘나 때’를 내려놓은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바다는 또한 성찰의 거울이다.

지구는 땅의 영역보다 물의 영역이 더 크다. 그러고 보면 지구는 땅의 별이 아니라 물의 별이다. 육지에서 살아가는 생물체들의 기원이 거기 물의 세계에서 나왔다. 태초의 생물로부터 사피엔스로 진화하고 성장하는 과정에 바다의 의미는 경험과 상상, 발견과 생존의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진화론에 근거한 바다는 시원이며, 놀이에 근거한 바다는 종착점이지 않은가.

바다는 낭만의 대상이기도 하고 예술 창작의 원형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바다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다. 예측 불가한 바다에서 다양한 생물들이 여타의 생물들과 서바이벌을 통해 살아간다. 먹이 사슬에서 살아남기 위해 저마다의 방법으로 생존해 나간다. 알에서 부화한 멸치는 다른 것의 먹이가 돼야 하고 해류를 따라 이동하면서 사피엔스의 촘촘한 그물에 걸린다. 사피엔스의 식탁에서 친숙한 멸치는 알에서 2㎜로 깨어나 15㎝까지 성장하며 10만 개의 알을 낳고 한 생을 마감한다. 15㎝ 성어로 자라는 동안 해류를 따라 흐르며 보고 들었을 멸치의 바다 이야기는 땅의 사피엔스가 상상할 수 있을까.

사피엔스의 세계와 멸치의 세계는 다른 듯 비슷하다. 깊고 넓은 바다, 극한의 세계를 헤쳐 나아가지만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숙명의 존재이다. 생자필멸의 고해, 멸치와 사피엔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 속에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는 데 있다. 다양성이란 생의 다채로움이다. 다채로움을 지지하고 끌어가는 힘은 건강한 관계이다. 설령, 예기치 못한 상황에 의해 우선멈춤은 있을지라도 곧 회복하는 탄력성이 그 속에 있다. 그것은 일종의 균형 감각이다. 균형감각은 공존의 힘이다.

총선이 끝났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후죽순 쏟아진 많은 말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국회의원이 되고 싶은 이들이 지금도, 전에도, 또 그전에도 혜성처럼 들고나온 그 많던 말들은 어디로 갔을까. 권력자들의 싸움에 등이 터진 사피엔스의 상처는 언제까지나 사피엔스의 몫이다. 권력을 얻은 자, 놓친 자들이 흩어놓은 말에 대한 책임은 애당초 없었다. 그냥 그때만 채우고, 그때를 끌고 가는 ‘그 따위 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따위 말’의 옆구리에조차 끼지 못하는 처지의 언어도 있다. 심각하게 다가온 생태환경 위기, 기후 위기가 그렇다. 세계가 기후재앙을 외치고 있는데도 이 땅의 정치언어는 여전히 개발을 통한 성장을 우선하기 때문이다. 권력을 가지기 위한 위정자의 언어 바탕에는 공존 대신 개발만 있을 뿐이다. 추측건대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는 정치는 미래를 복수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하늘은 바다를 반영하고, 바다는 하늘을 담는다. 높은 것은 높지 않고, 낮은 것은 낮지 않다. 멸치가 사라진 세상은 사피엔스도 살 수 없다. 정치도 생태도 균형이 깨지면 공멸한다. 멸치가 사라진 호모 사피엔스 바다에는 두 손을 담글 수 없다. 잊힌 놀이의 세계가 새삼 애틋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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