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부산포 해전을 부산대첩으로 명명해야

남송우 고신대 석좌교수 2024. 5. 2.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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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송우 고신대 석좌교수

지난 4월 28일은 이순신 탄신 479주년이었다. 부산대첩기념사업회는 부산여해재단과 함께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4월 26일 학술 세미나를 개최했다. 아직 공식화되지 못한 부산포해전을 부산대첩으로 명명하기 위해 공론의 장을 마련했다. 이 자리에서 필자는 부산포해전을 부산대첩으로 명명해야 할 당위성을 제안했다. 우리는 이순신이 싸운 해전 중 한산 명량 노량을 대첩으로 명명하고 있다. 그래서 부산포해전은 대첩의 반열에 들지 못했다. 그 이유는 역사의 해석이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7월 1일 자에 기록된 ‘이순신 등이 부산에 주둔한 적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다(李舜臣等攻釜山賊屯 不克)’라는 부분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당시 기록관들의 엄정성과 객관성이 제도적으로 보장됐지만, 선조실록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전쟁 중이라 사료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고 당파의 입장에 따라 왜곡된 기록이 많았다. 그래서 선조실록은 다시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해야 했다. 전쟁 후에 실록청이 방대한 자료를 모아 놓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임진 전쟁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전쟁사의 연표도 제대로 작성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 한 예가 부산포해전에서 격파한 왜선을 400척(이순신의 장계에는 100여 척으로 기록)이라고 엉터리 기록을 남기고 있는 부분이다. 그래서 선조실록은 조선왕조실록 중 가장 부실한 실록으로 평가된다. 새로 편찬된 선조수정실록과 선조실록을 비교해 보더라도 역사적 사건에 대한 수정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인물평에만 수정을 가한 정도다. 이러한 선조수정실록의 상황을 감안한다면, 이순신이 직접 참여하여 지휘한 해전에 대한 평가는 실록에만 의존하기보다는 이순신 자신이 남긴 기록에 바탕을 두고 해석하는 것이 훨씬 더 객관적이고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이순신이 남긴 기록은 일차적으로 해전을 치른 이후에 자신이 직접 작성해서 조정에 올린 장계 ‘임진장초’와 자신의 일상과 전투 상황을 기록한 ‘난중일기’이다. 이 두 자료가 해전에 대한 가장 정확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순신이 직접 작성한 임진장초에는 부산포해전이 어떻게 기록돼 있을까? ‘무릇 전후 4차 출전하고 열 번 접전하여 모두 다 승리하였다 하여도 장수와 군졸들의 공로를 논한다면 이번 부산 싸움보다 더할 것이 없습니다(凡前後四次 赴敵 十度接戰是白置皆致勝捷 若論將士功勞 則莫逾於今番釜山之戰)’라는 기록을 보면, 실록의 기록이 실제 부산포해전 결과와 얼마나 큰 간극이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이순신 자신은 부산포해전을 임진년 해전의 최고의 승전으로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확실한 기록은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에서 직접 대첩을 언급하면서 임진년 대첩을 기록해 두고 있다는 점이다. 명량해전을 앞둔 정유년 9월 15일 자 일기에는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如此則大捷 如此則取敗云)’고 했고, 13일 자 일기에는 ‘임진년 대첩할 때와 대략 같았다. 무슨 징조인지 알 수 없었다(與壬辰大捷略同 未知是兆)’고 기록해 두고 있다. 꿈에 나타난 사실에 대한 기록이긴 하나 명량해전이 대첩이었고, 그 대첩과 동궤로 임진년 대첩을 이순신 자신이 명명하고 있다. 이순신이 기록한 임진년 대첩은 부산포 장계에서 기록한 4차례의 대전을 말한다. 그러므로 부산포해전은 부산대첩으로 명명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왜냐하면 앞선 임진장초에서는 부산포해전을 가장 큰 싸움으로 기록했고, 난중일기에서는 이를 임진년대첩으로 명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조선 중기 첨지중추부사에 올랐으나, 관직보다는 학문에 뜻을 두었던 학자 최시옹(1646-1730)은 ‘동강유고’ 행장편에서 부산대첩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역사적인 부산대첩의 날을 우리는 부산시민의 날로 정해두고도 아직도 북항 앞바다에 깊이 수장시켜두고 있다. 부산대첩이란 역사적 보물을 이대로 방치해 두어서는 안 된다. 화려한 북항 재개발의 청사진을 그리기 전에 이순신 장군이 북항에 남겨둔 우국충정과 사랑 정성 정의 자력의 정신을 제대로 건져올리는 밑그림부터 다시 그려야 한다. 이것이 지역소멸의 위협이 현실화되고 있는 부산을 다시 세워나가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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