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 어때] 새벽빛을 타고 날아든 순수한 위로, 전주영화제 개막작 ‘새벽의 모든’

2024. 5. 2.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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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조선일보 문화부 신정선 기자입니다. ‘그 영화 어때’ 63번째 레터는 1일 막 올린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 ‘새벽의 모든’입니다. 저는 30일 늦게 KTX를 타고 전주에 내려왔는데요, 오늘(1일) 오후 기자시사회에서 만난 ‘새벽의 모든’은 지면 마감을 제치고서라도 레터 독자 여러분께 소개해드리고 싶어질 정도로 반가운 작품이었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야심한 밤에 별자리를 탐험하러 나서고 싶어지실지도 몰라요.

영화 '새벽의 모든'에서 가장 장난스럽고 유쾌한 장면. 공황장애가 있는 남자 주인공이 미용실을 못 가는데요, 여자 주인공이 집에 찾아와서 커트를 해주겠다고 합니다. 한 번도 머리 손질을 해본 적 없는 그녀의 솜씨. 과연 어떤 결과를 낳을지. 꼭 영화관에서 확인하시길.

제가 레터를 쓰고 있는 1일 밤, 전주에는 비가 제법 오네요. ‘새벽의 모든'도 비 오는 거리에서 시작합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버스정류장 벤치에 정장을 입은 여자가 누워있어요. 벌써 뭔가 이상하죠? 가방은 내팽개친 건지 떨어진 건지 도로에 널브러져 있습니다. 경찰이 다가와 상황을 확인하는데, 이 분, 가방 안의 내용물을 하나씩 꺼내서 내버립니다. 알고보니 그녀는 월경전증후군. 월경 전 며칠은 분노가 들끓어서 평소의 성실하고 예의 바른 그녀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됩니다. 회사 사람들에게 의도와 달리 무례하게 굴고요. 병원 처방약을 먹으니 졸음이 쏟아져서 회사에서 잠들어버립니다. 결국 사표.

그녀가 아주 작은 중소기업, 아동용 과학 키트 제조회사에서 일하다 만나는 사람이 공황장애를 가진 남자 주인공입니다.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아주 유망한 직장에서 일했던 것 같은데요, 어느 날 라면을 먹다가 갑자기 찾아온 공황장애 때문에 그 회사를 그만두고 이직을 하게 됐습니다. 지하철도 못 타고 미용실도 못 가고요, 이직한 회사를 싫어해요. 코딱지만한 회사는 오종종 가족 같은 분위기. 주전부리 간식을 나눠 먹으며 호호호 웃음을 나누는 직원들 모습부터가 남자 주인공이 보기에는 답답하기 짝이 없습니다. 언제든 탈출 모드.

두 사람은 회사 자리가 나란히 붙어있어요. 첨엔 서먹한데, 어느 날 발작이 온 남자를 여자가 도와주다 가까워지게 됩니다. 보통 영화 같으면 남녀 사이 므흣한 시선이 오갈 거 같은데 이 영화는 전혀 그런 게 없습니다. 너무 깔끔한 그 경계가 어색할 법도 한데 매우 자연스러워요. 오히려 다정하고 편안하게 느껴지고. 남자는 월경전증후군이 뭔지 책을 빌려가며 공부하고, 여자도 블로그를 탐독하며 남자를 이해하려 애씁니다. 그렇게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를 지켜주고 의지하는 관계로 이어집니다.

병명은 사실 중요하지 않아요. 저도, 이 레터를 보시는 독자분들도, 누구나 갖고 있을 법한 말못할 고통이나 아픔, 혹은 상처 같은 걸 얘기하는 거죠. 가족이나 연인이 아니더라도 그런 속내를 알아봐 주고 위로해주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면 세상은 아주 조금 더 아름다운 곳이 될 수 있지 않나, 그런 환한 기대가 빛나는 영화입니다.

1일 오후 전북 전주시 완산구 고사동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에서 열린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 '새벽의 모든' 기자회견에서 미야케 쇼 감독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위의 사진이 오늘 기자회견에 참석한 ‘새벽의 모든'의 미야케 쇼 감독입니다. 가운데 마이크 드신 분. 84년생인 미야케 감독은 어떤 질문이든 유쾌하게 답변하시더군요. 작년 부산국제영화제 때 만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제 대학원 때 지도교수님이 떠오르는, 질문을 정확하고 깊이 있게 하지 않으면 답변하기 전에 들릴락말락 한숨을 쉴 거 같은, 매우 진지하고 학구적인 분위기였는데, 미야케 감독은 길가다 실없이 농담을 건네도 마주 보며 우하하핫 박장대소할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새벽의 모든'도 그렇고 작년에 개봉한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도 그렇고 영화 분위기하곤 참 다른 실물이었는데, 촬영 현장에선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네요.

제목이 ‘새벽의 모든'인데 영문으로는 ‘All the long nights’ 입니다. 그 모든 긴 밤들. 한국어 제목의 시적인 느낌도 참 좋네요. 원제에 나오는 밤은 주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두 주인공이 근무하는 회사가 과학 키트 만드는 곳이라, 후반부에 천체투영기를 극지방 이글루처럼 아주 크게 만들어놓고 그 안에서 사람들에게 별자리를 보여주는데요, 거기서 주인공이 말해요.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슬픔도 기쁨도 지구가 자전하는 한 반드시 끝난다, 밤이 있기에 무한한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 새로운 새벽은 찾아온다.”

우리가 어두운 밤이라고 두려워만 하는 순간은 새벽을 품고 찾아오는 것, 고통이 있기에 구원도 있는 것. 이런 속삭임을 마음 속에서 새기며 시사회장을 나왔습니다. 극장 개봉하면 꼭 보세요. 특별한 갈등이나 사건도 없는데 빠져들듯 보시게 될 거에요. 그럼, 저는 서울 올라가 다음 레터를 준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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