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플라자] 챗GPT 시대에도, 언어 능력이 ‘안전 자산’

천현우 작가·前용접 근로자 2024. 5. 1.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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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어쩌다 보니 용접하다가 미디어 플랫폼 회사로 이직했다. 그러다 이젠 게임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게임 제작은 청년들이 ‘IT산업’ 하면 떠올리는 대표 업종이다. 설비보다 인력 의존도가 훨씬 높다. 시장도 크고 고용도 많이 한다. 노동 강도가 꽤 강하며 사람마다 실력도 천차만별이다. 그야말로 21세기 초의 노동집약산업이라 할 수 있다. 아직 생긴 지 반세기가 지나지 않은 업종인 만큼 구성원들 또한 매우 젊다. 어느 정도냐면 스무 살 여성이나 스물둘 남성들도 종종 면접 보러 올 정도다. 어느 공장에서도 막내 언저리였던 90년생이 여기선 연장자 취급을 받는다. 그렇다. 나는 이 업계에선 ‘늙은 신입’이다.

내 직무는 시나리오 기획이다. 게임 회사에서 가장 욕 많이 먹는 직군 중 하나다. 게이머들은 스토리가 흥미롭지 않으면 가장 먼저 시나리오 기획자부터 성토하곤 한다. 소설 작가나 영화감독의 역할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기획자의 실제 업무는 이미 만들어놓은 등장인물과 배경을 취합, 게임 형태에 걸맞도록 이야기를 구성해 보고서로 만들어 올리는 일에 가깝다. 이는 문학과 다른 영역이다. 감탄 나오는 문장을 쓰는 일보다 단숨에 알아듣도록 쓰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 다행히 칼럼을 쓰던 가락이 있어 글 쓰는 일은 그럭저럭 해나가고 있다. 보고서를 쓰기 위해 직장 동료들한테 이것저것 묻고 돌아다니다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됐다. 사람들끼리 서로의 생각을 전달하기 힘겨워한다는 점이었다. 특히나 학창 시절에 코로나를 겪었던 사원들이 유달리 그랬다. 문제는 게임 제작은 정말이지 끊임없이 언어를 주고받아야 하는 일이란 점이다. 내 다음 공정 사람한테 말과 글을 총동원해서 의도를 전달해야 한다. 게임 제작은 대체로 분업 구조인 데다가 시간이 곧 돈인 직종이라 소통 오류는 곧바로 손실로 이어진다. ‘배달 사고’가 덜 일어나려면 적확한 언어 구사와 듣기가 정말 중요하다.

천현우 작가·前 용접 근로자.

그런데 잘 쓰고 잘 읽기, 잘 듣고 잘 말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란 점이다. 끊임없는 반복 연습과 공부 둘 다 필요한 영역인데 정작 너무도 쉽게 학습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 추측건대 소통 능력은 직장 내에서 도움은 될지언정, 막상 취직할 땐 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 아닐까 싶다. 애초에 성안으로 들어가기가 힘든데, 성안에서의 예법이 중요하다고 말한들 무슨 호소력이 있을까. 이 현실을 알기에 다 제쳐두고 한국어 잘 다루는 연습부터 하자는 말은 못 하겠다. 다만 굉장히 유용하다는 점은 꼭 짚고 넘어가고 싶다. 더군다나 요즘엔 생성형 AI라는 든든한 아군도 생겼다. 인공지능은 언어를 기반으로 작동한다. 챗GPT나 미드저니를 잘 써먹으려면 ‘기계가 잘 알아먹게’ 단어를 구사해야 한다. AI가 아직까진 영어에 훨씬 친숙하다고 좌절하지 않아도 된다. 번역 소프트웨어 또한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있고 지금도 이미 충분한 수준이다. 만능은 아니지만 훌륭한 작업 보조 도구로 써먹기엔 손색이 없다. 이젠 나 같은 ‘노 베이스’들도 주눅 들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바야흐로 하루 단위로 기술이 팽창하는 시대다. 이 발전이 앞으로 게임업계, 나아가 지식노동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겠다. 관성대로 일하면 실업자 된다는 여론이 주류인 듯하지만, 그조차 확실하지 않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단순노동부터 기계가 대체한다고 했었다. 지금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전망이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든 언어는 안전자산이다. 이과 졸업하지 않은 모든 청년이 더는 ‘문송’해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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