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신극 운동의 선구 `토월회`, 이월화·윤심덕에 열광한 관객

2024. 5. 1.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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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도쿄 유학생들의 움트는 연극 정열 처음 보는 신극에 감동의 박수 터져 대성황에 '만세' 부르다 연행되기도 용감하게 무대 오른 신여성 배우들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처음 시작한다는 것은 어린 새싹이 땅을 뚫고 나오는 것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은 느닷없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한 겨울 추위를 땅 속에서 굳세게 견디어야만 봄을 맞아 바람과 땅과 햇볕의 힘으로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100년 전 일본식 삼류 신파극에서 못 벗어나던 우리 연극계에 혁신을 가져온 것이 있으니 바로 신극(新劇) 극단 토월회(土月會)다. 100년 전 신문을 통해 당시의 토월회 모습과 그 주역(主役)들을 찾아나서 본다.

토월회는 1923년 5월, 당시 도쿄(東京)에서 대학을 다니던 박승희(朴勝喜), 김복진(金復鎭), 김기진(金基鎭), 이서구(李瑞求), 박승목(朴勝木), 김을한(金乙漢), 이제창(李濟昶) 등이 시작한 모임이었다. 대부분 연극과는 거리가 멀어 처음에는 예술 전반에 걸친 문예 서클로 출발했다. 토월회라는 이름은 현실(土)을 도외시하지 않고 이상(理想), 즉 달(月)을 지향한다는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

1923년 6월 13일자 동아일보에 토월회의 제1회 연극 공연 기사가 실려 있다. "일본 동경에 있는 조선 유학생 중에서 예술에 대한 이해와 연구가 있는 사람들이 조직한 토월회에서는, 이번 여름 휴학을 이용하여 경성에 돌아와 임시사무소를 낙원동 149번지에 두고 연극회와 미술전람회를 개최하였다는데, 연극은 오는 6월 하순에 시내 수은동 단성사에서 '유-젠. 피롯트'의 '기갈(飢渴)'과 '안톤. 첵호푸'의 '곰'과 사람을 영혼까지 웃기게 하고야 마는 희극 작가 '뻐-나드.쇼-'씨의 '그 남자가 그 여자의 남편에게 무엇이라고 거짓말을 하였나'와 박승희(朴勝喜)씨의 '길식(吉植)' 등을 올릴 터인데, 전부 1막 거리로 의복과 배경은 다 동경에서 맞춰 가지고 나왔다 하며, 또한 7월 상순에는 동아부인상회를 빌어 미술전람회를 개최하고 조각(彫刻), 양화(洋畵) '떼싼' '무대떼싼' 등 30점 가량의 회원의 작품을 진열하려 한다라더라."

이어 같은 해 9월 15일 제2회 공연이 7일간 조선극장에서 열렸다. 공연 전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이미 만반의 준비가 착착 진행되어 오는 15일 밤부터 7일간을 두고 조선극장에서 개연을 할 터인데, 1천여원을 들여서 꾸며 놓은 무대장치와 2개월을 두고 익혀 놓은 기술은 면목이 일신(一新)할 터인데, 이번에 상연하는 연제는 세상이 다 아는 '톨쓰토이'옹의 '카추샤'와 학생극으로 타는 듯한 사랑에 얽매이고 높은 지위에 끌려 어찌할 줄 모르고 울어버리는 젊은 공자의 쓰린 심정을 그려낸 '알트 하이델베르히', '오-규스트, 스트린베르히'씨의 걸작 '채귀(債鬼)' 외에, 제1회에 가장 많은 찬성을 받던 '오로라'를 다시 상연할 터이라 한다." (1923년 9월 11일자 동아일보)

제2회 공연에서는 웃지 못할 사건도 벌어졌다. "수일 전부터 조선극장에서 열린 '토월회(土月會)'의 연극은 상당히 성황을 이룬 모양인데, 첫날 밤에 연극을 마친 후 토월회 동인들은 성공을 축하하기 위하여 '만세'를 불렀다. 만세 소리를 들은 종로 경찰서의 순사는 배우 일동을 데려다가 '다시는 그런 불온한 일을 하지 말라'고 엄중 설유를 했다던가. 사소한 성공에 만세를 부르는 풋기운도 우습지만 이를 '엄중(嚴重) 설유(說諭)'하는 경찰도 할 일이 없는 모양. 말이 났으니 말이지 각본 '부활'의 제1막 중에 월하(月下)에서 공작과 '카추사'가 껴안고 수작하는 것은 '풍속(風俗) 괴란(壞亂)'의 염려가 있으니 '껴안지는 말라'고 엄중한 경고가 내렸다든가. 경고가 내린 이상에는 어찌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마는 그 연극 중에서 가장 자랑하는 첫 막이 이렇게 서리를 맞게 되면 연극 꼬락서니는 무엇이 될꼬." (1923년 9월 21일자 동아일보)

토월회는 기부금 모집을 위한 자선공연도 많이 했다. '토월회(土月會)의 의연(義捐) 출연'이라는 1924년 5월 11일자 동아일보 기사다. "충북 영동(永同)청년회에서 경영하는 영동여학원이 곤경에 빠졌다는 소식을 들은 서울 토월회에서는, 오는 12~13일 양일간 매일 밤마다 시내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에서 자선 흥행을 하여 수입 전부를 영동여학원에 기부한다는데, 상연할 각본은 '오로라'와 '사랑과 죽음' 등 호평을 받던 것이요, 입장료는 1원, 50전, 30전이라더라."

예나 지금이나 극단의 꽃은 두말 할 것 없이 여배우였을 것이다. 그 중 가장 유명했던 이월화(李月華)와 윤심덕(尹心悳)의 이야기를 찾아 보자. "이월화(李月華) 양! 조선의 유일한 여배우요 예원(藝苑)의 여왕(女王)인 이월화 양! (중략) 그가 진명여학교의 보통과를 마치고 이화학당 중학과에 입학한 어떠한 해 가을 어떠한 날 저녁에 우연히 친구에게 끌려 연극 구경을 처음으로 한 후부터 단순한 처녀의 마음이 연극이란 한 곳으로 쏠리게 되어 밥은 굶을지언정 연극은 아니 구경할 수 없게까지 그것을 사모하고 동경하였다 한다." (1924년 3월 18일자 매일신보)

또 한 명의 꽃이 있었다. '사(死)의 찬미(讚美)'와 '현해탄에서의 정사(情死)'로 유명한 윤심덕이다. 1926년 8월 5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현해탄 격랑(激浪) 중에 청년 남녀의 정사(情死)'라는 제목의 기사다. "지난 3일 오후 11시에 시모노세키(下關)를 떠나 부산으로 향한 관부연락선 덕수환(德壽丸)이 4일 오전 4시경에 대마도 옆을 지난 즈음에, 양장(洋裝)을 한 여자 한 명과 중년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으로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하였는데, 즉시 배를 멈추고 부근을 수색하였으나 그 종적을 찾지 못하였으며, (중략) 남자는 김우진이요 여자는 윤심덕이였으며, 유류품으로는 윤심덕의 돈지갑에 현금 140원과 장식품이 있었고, 김우진의 것으로는 현금 20원과 금시계가 들어 있었는데, 연락선에서 조선 사람이 정사(情死)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더라."

이후 여러 가지 문제로 해산과 재기를 반복하던 토월회는 1946년 끝내 해체를 하고 만다. 그렇지만 토월회는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본격적인 신극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한국 연극 발전에 크나큰 기여를 했다. 앞으로도 한국 연극 발전의 중요한 지표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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