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마지막까지 막내 ‘박종철’ 이름 석자 말하지 않으셨죠”

한겨레 2024. 5. 1.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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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40년 만에 막내에게 가신 엄마 정차순씨를 떠나보내며

고 정차순씨. 이현주 박종철센터 센터장 제공

지난 4월17일 세상을 뜬 엄마(박종철 열사 모친 정차순)는 나에게 친구이고 언니이기도 했다. 엄마는 나와 세상과의 끈이었다. 60년 넘게 세상살이를 했는데 엄마, 아버지께서 안 계시니 세상이라는 넓은 공간에 나 혼자 남겨진 느낌이 들어 요즘은 헛헛하고 헛헛해서 매일 그냥 본능으로 움직이고 있다.

우리 3남매는 지극히 안정된 가정에서 자랐다. 그 시대 아버지들 같지 않게 아버지(고 박정기)는 몹시 가정적인 분이셨다. 평생 두 분은 존댓말을 쓰셨고 우리 앞에서 부부 싸움을 한 적이 없으셨다. 아버지는 우리들 숙제와 먹을 것을 챙기고 씻기는 담당이셨다. 엄마는 우리 학교생활 뒷바라지와 집안 살림을 담당하셨고 매일 기도로서 하루를 시작하는 분이셨다. 그 기도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아침잠을 깨곤 했다. 오직 자녀 셋을 위한 집이었다. 이 또한 세상살이 60년을 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고 정차순씨와 딸 박은숙씨. 필자 제공

엄마는 일생 중 가장 행복했던 때를 막내(박종철) 고3 때라고 늘 말씀하셨다. 그때 우리 집은 철이 모교인 부산 혜광고가 멀리 바라보이는 위치에 있었다. 당시 철이 성적은 희망 학과에 서울대는 부족하고 연세대는 안정권이었는데, 철이는 서울대를 목표로 고3 1년 동안 최선을 다해 공부하겠다고 다짐했다. 엄마는 그런 막내를 무척 자랑스러워하셨고 최선을 다해 뒷바라지하셨다. 철이는 새벽 6시에 학교 도서관 불을 직접 켜면서 등교했고 밤 10시에 도서관 불을 직접 끄면서 하교했다. 점심 도시락은 등교 때 본인이 가지고 갔지만 저녁은 갓 지은 밥에 영양 듬뿍 담은 도시락을 엄마가 매일 학교로 가져다주셨다. 그 후 밤 10시에 학교 도서관 불이 꺼지면 엄마는 철이 마중을 나갔다. 집에서 도서관이 멀리 보였다. 둘은 집과 학교 중간쯤에서 만나 손을 꼭 잡고 하루 있었던 일을 도란도란 이야기하면서 귀가했다. 그 시절이 엄마의 일생 중 가장 행복했다고 늘 말씀하셨다. 그랬던 막내를 4년 뒤 이 땅의 경찰들에게 너무도 어이없고 비참하게 빼앗겼다.

오직 자녀 셋을 위해 사셨던 엄마
1987년 곡기 놓고 막내 따라가려다
남편 건강 잃는 모습에 몸 추스르고
막내 선후배들 수배생활 뒷바라지도

“고3 막내와 귀가할때 가장 행복했다”
임종까지 가슴에만 그리움 쌓으며
그렇게 엄마는 가족을 지켜내셨죠

1987년 사건 당시 엄마는 막내 혼자 못 보낸다고 자기가 따라가야 한다고 곡기를 놓으시고 매일 절에 가셔서 부처님께 기도만 하셨다. 철이한테 데려가 달라고…. 나는 당시 철이 잃은 충격보다 엄마마저 잃게 될까 봐 그게 더 무서웠다. 나뿐 아니라 온 가족이 그랬다. 오빠(박종부)는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동생 사건의 충격으로 매일 술을 많이 드셨고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는 약혼녀의 연락이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부산시청 공무원으로 정년 퇴임을 앞두고 계셨다.

1987년 3월3일 부산 사리암에서 열린 박종철 열사의 49재에서 어머니 고 정차순(왼쪽부터)씨, 형 박종부씨, 누나 박은숙씨, 아버지 고 박정기씨 등 가족들이 합장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박종철을 살려내라’, ‘전두환 정권은 퇴진하라’ 구호 아래 대규모 범국민대회가 전국적으로 수차례 열렸고 국민은 거리를 메웠다. 이에 우리 가족의 참석을 막기 위해 공권력이 총동원됐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회유와 압박은 대단했다. 매일 고위 간부들이 못 마시는 술자리로 불러냈다. 곤드레만드레 되셔서 귀가하는 날이 많아졌고 아버지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곤 했다. 아버지의 건강도 급속히 나빠졌다. 엄마는 자책하셨다. “가정의 중심이 이러고 있으니 온 식구 다 죽겠다. 내가 빨리 철이한테 가지지도 않고” 하시며 몸을 추스르고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고 장도 보고 반찬도 만드셨다.

1987년 2월 어머니 정차순씨와 누나 박은숙씨가 경찰의 저지로 박종철 열사의 서울 추도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자, 부산 괴정동의 사리암에서 “종철아 이 종소리 듣고 깨어나거라”라고 울부짖으며 종을 치고 또 쳤다. 사진 보도사진연감

일 년 정도 지나 아버지 퇴직금으로 아예 서울에 집을 장만하고 가족을 한집에 불러모았다. 이런 엄마 곁에 그림자처럼 붙어 있으면서 나는 봤다. 가족을 위해 집안일을 하시면서 매일 엄마는 울고 계셨다. 그렇게 손주들도 키우셨고 그 많은 종갓집의 제사와 대소사들도 빠짐없이 챙기셨다. 때로는 철이 선후배들의 수배 생활 뒷바라지까지도 하셨다. 아버지는 정년 퇴임과 함께 아들 뒤를 잇겠다고 이 땅의 민주화 전선에 뛰어드셨고, 전태일 열사 어머니 이소선 어머님, 이한열 열사 어머니 배은심 어머님, 그리고 여러 민주 열사 가족들과 함께하셨다.

고 정차순씨. 필자 제공

30여 년의 세월이 지나가고 있었고 그렇게 엄마는 가족을 지켜내고 계셨다. 그러는 동안 우리 가족은 철이 이름, 박종철 석자를 입에 담지 않으려 했다. 박종철 석자를 채 다 부르기도 전에 누구라 할 거 없이 언제라 할 거 없이 항상 울먹이고 울음바다가 되었으니, 약속도 없이 우리는 스스로 다짐하게 되었던 거다. 가슴에 차곡차곡 쌓기로. 철이의 기억을 그리움을….

엄마에게서 언제부터 치매 기운이 느껴졌다. 오빠와 나는 마치 많은 치매 환자의 경험이 있는 듯 담담하게 엄마의 변화된 모습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가슴에 그런 상처를 품고 평생 건강하게 사신다면 거짓말이 아니겠는가?! 치매 진단 후 의사의 권유로 요양병원에서 뇌 훈련의 하나인 ‘가족 이름 말하기’를 하실 때, 막내아들 차례에서 항상 입을 다무셨다. 엄마는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40년 가까이 막내아들 박종철 이름 석자를 입에 담지 않으셨다.

고 정차순씨와 딸 박은숙씨. 필자 제공

엄마의 마지막 모습은 너무나 평온하셨다. 주무시는 듯해 몇 번이나 숨소리를 확인해 볼 정도로 평온하셨다. 더할 수 없는 최선으로 남은 가족을 지켜내셨고, 죽을 힘을 다하여 막내 철이를 찾아가셨을 것이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막내 손을 잡고 계시니 저리 평온하고 예쁜 모습으로 누워계시다는 것을. 그래서 엄마의 죽음을 마음껏 슬퍼할 수가 없다. 평생소원이신 막내를 찾아가셨으니 말이다.

박은숙/박종철 열사 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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