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의 YTN[꼬다리]

2024. 5. 1.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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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의 유진그룹 인수(민영화) 후 첫 주주총회를 앞둔 지난 3월 29일 서울 마포구 YTN 사옥 1층에서 YTN 직원들이 유진그룹 인수와 김백 전 상무 대표이사 임명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조해람 기자



외할머니는 요양원에 가기 전 몇 년을 우리 집에서 지냈다. 거동이 불편해 사교생활은 소박했다. 대화 상대는 휴학 중이던 나나 우리 가족, 당신이 ‘꼬마’라고 부르던 반려견, 종종 찾아오는 친척들 정도였다. 몇 안 남은 오랜 지인들의 전화는 조금씩 줄어갔다.

스마트폰도 컴퓨터도 쓰지 않던 외할머니는 TV를 통해 세상을 봤다. 매일 늦은 아침에 일어나 옷매무시를 다듬고,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틀었다. 채널은 늘 YTN이었다. 세상의 속도에 맞춰 살기 어려웠던 외할머니에게 ‘24시간 보도채널’ YTN은 언제든 바깥소식을 들려줄 수 있었다.

외할머니는 종종 뉴스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렴 어땠을까. 세상과의 끈이 몇 가닥 남지 않은 외할머니에게 뉴스는 세계와 내가 끊어져 있지 않다는 위안이기도 했다. 바깥세상과의 접촉면이 점점 줄어가는 90대의 날들. 외할머니는 그렇게 매일 오후, 타자와 연결됐다.

돌아보면 YTN은 그런 곳에 자주 틀어져 있던 것 같다. 잘나가는 세상으로부터 반 발짝 떨어진 장소들. 이를테면 작고 오래된 식당과 요양병원, 시장 반찬가게와 경비원 휴게실 같은 곳들. 내가 이해하는 YTN의 소명은 거기에 있었다. 남을 위해 너무 바빠서 세상을 읽는 시간을 따로 빼기 어려운 이들이나, 아프거나 늙어 정보시장에서 멀어져 버린 이들을 위해 YTN은 24시간 소식을 전했다. 놓칠세라 아침, 점심, 저녁, 새벽에도.

그러니 권력은 탐이 났을 것이다.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이 눈과 귀를 의지하는 저 채널을, ‘24시간 정권 나팔’로 개조할 수 있다면. 이 정부는 유혹에 약하다. 거친 속도전으로 공영방송 YTN을 순식간에 민영화했다. YTN을 산 유진이엔티는 김백이라는 이를 사장으로 앉혔다. 과거 이명박 정부를 비판한 기자들을 무더기로 해고했던 인물이다.

YTN은 그 뒤로 계속 ‘잔인한 봄’이다. 지난 3월 29일, 김백 사장 선임안이 의결된 주주총회 현장을 취재했다. YTN 직원들은 ‘정권 나팔수 거부한다’, ‘무자격 사장 물러가라’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주총에 참석했다. 한 직원은 “흙탕물로 더럽혀지기 전에 주주분들이 YTN을 지켜주셨으면 한다”며 울었다. 곳곳에서 울음이 터졌다. 최대지분을 소유한 유진이엔티가 찬성하면서 안건은 원안대로 가결됐다. 새 사장은 현 정부를 불편하게 한 기자들을 한직으로 내몰고, 권력을 감시하고 풍자한 방송에 칼을 댔다.

잔인한 봄의 한가운데에서 YTN 직원들은 끈질기게 싸우고 있다. 방송의 공공성·공정성을 지키고, 소중한 일터와 동료를 지키는 싸움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남들만큼 뉴스를 챙겨보기 어려운 수많은 장삼이사에게 ‘똑바른 방송’을 계속 보여주려는 싸움이기도 할 테다.

YTN 노조위원장은 기자회견에서 “지치지 않게, 재밌고 신나고 흥겹게 싸우자”고 했다. 쉬운 싸움은 없기에, 차마 나까지 “싸우라”는 말을 그들의 어깨 위에 얹기는 망설여진다. 다만 그들의 뚝심을 잘 지켜봐 달라고, 이곳저곳에 말할 수는 있을 듯하다. 뚝심 있는 기자는 좋은 기자다. 믿을 수 있는 기자다. 그렇게 배웠다.

조해람 기자 lenn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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