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거장 세상을 잇고, 추억을 품다] 6. 실향민 굴곡진 삶 간직한 신철원버스터미널

이재용 2024. 5. 1.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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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폐허 속 ‘종점’에서 시작된 삶의 이야기
전쟁 직후 사회 기반 재건 움직임
1950년대 중반 신철원 시장 형성
‘종점’ 조성 버스·트럭·경운기 정차
1976년 현대식 버스터미널 준공
군인·학생·주민 한가득 경제 활성
1990년 4층 건물 신축 ‘최대 호황’
자가용 증가·노후화 등 이용객 감소
군, 터미널 건물 매입 시설 리모델링
2021년 ‘신철원감성터미널’ 완공
세대 연결 지역 중심지 새역할 기대

한국전쟁 포화 속에 폐허가 된 철원지역은 1953년 휴전과 1954년 수복지구에 대한 유엔군의 행정권 이양이 완료되면서 시가지를 재건하고 몰려드는 실향민들을 위한 주택과 농지 등을 새롭게 마련해야 했다. 현재와 같은 버스터미널의 모습을 갖추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으며 전쟁 직후 원주민과 함께 북한에 고향을 두고 남하한 실향민들의 굴곡진 삶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 2021년 리모델링 되기전 신철원시외버스터미널 모습.

■ 실향민들의 애환 서린 버스종점

철원군 갈말읍의 현재 신철원감성터미널 주변에는 전쟁 직후 1950년대 중반부터 신철원시장이 들어서기 시작했는데 당시 다 쓰러져가는 판잣집에 겨우 좌판을 펼쳐놓고 운영하는 구멍가게 수준이었다. 신철원이라는 지명은 당시 지포리에 미군들이 시가지를 닦으면서 생겨났다. 현재와 같은 터미널은 당시 없었고 신철원을 출발해 동송읍과 철원읍, 김화읍, 서면 와수리 등을 왕래하는 완행버스가 주차하는 종점으로 불렸다. 또한 장에서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 인근 지역에서 몰려드는 트럭과 경운기 등이 종점으로 몰려 들었다.

철원군 갈말읍에서 태어나 자란 김영규(62) 철원역사문화소장은 지역 어르신들의 구술자료를 토대로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김 소장은 “수복직후 철원의 급선무는 사회기반 시설과 경제의 재건이었다. 당시 철원군청 건물은 철원군 갈말면 지포리 미군부대 건물을 임시청사로 사용했으며 현재의 신철원중학교 자리다. 이후 군청 인근에는 미군정이나 한국군이 지어서 피난민들에게 무상으로 공급한 구호주택을 비롯해 실향민들이 판잣집을 지어 생활했다”고 밝혔다.

이어 “1958년 무렵 신철원시장은 작은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생겨 장마당에는 많은 장꾼들이 있었으며 지포리와 문혜리, 내대리, 지경리, 토성리, 강포리 등 갈말 전역에서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당시 장은 이곳밖에 없었고 인근지역 구멍가게들도 신철원장에서 물건을 해갔다”며 “이렇듯 장이 활성화되면서 인근 지역을 왕래하는 대중교통, 완행버스의 필요성이 늘어나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철원시장과 버스종점 주변으로 상가가 늘어나기 시작해 대창상회, 한양상회를 필두로 종점상회, 서울약국, 동화여인숙, 개풍상회, 환준상회, 군탄집 등이 생겨났다”고 말했다. 또한 “철원에서 서울로 향하다 보면 현재 경기도 운천에 못미쳐 강포리검문소가 있어 수복지구로 넘나드는 사람들을 심하게 검문했다. 이어 서울까지 약 4~5개의 검문소가 설치돼 있어 버스를 세우고 10분 이상씩 검문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 신철원시외버스터미널 개장으로 전성기 맞아

철원지역 주민들의 생활이 안정화되면서 유동인구가 점차 늘어 대중교통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1960~1970년대에 버스 노선이 서울행은 직행, 춘천을 비롯해 김화·동송지역은 완행버스로 운행됐다. 특히 시외버스 노선이 구축되며 1976년 비로소 신철원버스터미널이 준공됐다. 신철원버스터미널은 이전 공터에 버스가 정차하던 방식에서 지붕과 기둥을 세우고 구역별로 버스노선을 알리는 간판을 걸어 현대식 버스터미널로 변모했다. 대중교통이 증가하던 시대적 상황에 맞게 신철원버스터미널의 이용객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중반 철원군 갈말지역은 판잣집 없는 주택 건설, 차도·인도 구분 포장, 버스종점 확장으로 인한 가로수 정비, 자동식 전화보급 등으로 전쟁의 흔적을 씻어가기 시작했다. 1976년부터 각종 건축자재가 들어와 갈말도심이 현대식 건물로 세워지기 시작했다. 1977년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현재 군청까지 약 600m를 중심으로 도로를 넓혀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하수구 공사와 도로포장이 완료되면서 새로운 도심이 완성됐다.

1970년대 철원시외버스터미널 옆에서 부모님이 동화여인숙을 운영했던 권기원(62)씨는 “당시는 서울이나 춘천으로 가는 시간이 오래걸려 막차가 오후 3~4시 정도라, 버스 기사들이 여인숙에 매일 6~10명씩 묵었다”며 “서울로 가는 버스는 영종여객, 춘천으로 가려면 삼용버스를 이용해야 했다. 서울을 오가더라도 신철원에서 버스를 갈아 타야했기에 종점에 사는 것만으로도 그만큼 편리했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현재 신철원버스터미널에서 39년째 길목해물칼국수를 운영하는 박상명 대표는 “1980년대 철원을 방문했는데 신철원버스터미널에는 군인과 학생, 주민들로 가득했다”며 “많은 유동인구가 터미널을 기점으로 움직이고 있어 1986년 이곳에서 칼국숫집을 시작하게 됐다”고 당시의 번화했던 상황을 기억했다.

▲ 지난 2021년 리모델링을 거쳐 완성된 신철원감성터미널.

■ 미래를 향한 신철원감성터미널

신철원버스터미널은 1990년 4층 건물로 신축되면서 최대 호황기를 맞았다. 터미널 주변으로는 신철원전통시장과 더불어 많은 상점들이 새롭게 문을 열기 시작했으며 명실상부 신철원의 중심지가 됐다. 그러나 시외버스 주 이용객들인 군인들과 학생수 감소, 자가용의 증가, 시내버스 및 마을버스 증가 등으로 터미널을 이용하는 주민들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신철원시외버스터미널이 4층으로 신축된지 28년이 지나면서 노후한 내부시설로 이용객들의 원성을 사기 시작했다. 당시 터미널 안은 더럽혀진 벽면에 청소가 안돼 곳곳에 휴지조각과 깨진 창문, 훼손된 플라스틱 의자 등이 방치돼 있었다. 특히 터미널 안은 겨울철 난로 등 난방시설조차 갖추지 못했고, 화장실마저 굳게 닫힌 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에 철원군은 갈말읍 도시재생 사업의 하나로 신철원터미널 리모델링 사업을 추진했다. 개인 소유인 터미널 건물을 매입해 2021년 리모델링을 마무리했다. 터미널 이름도 미래를 향하며 신세대와 구세대를 모두 아우를 수 있도록 신철원감성터미널로 정했다. 또한 사용시설의 극대화를 위해 1층에는 매표소와 대기실, 화장실 엘리베이터를 신설했으며 2~4층은 철원군사회복지협의회를 비롯한 사회단체의 임시 사무실로 우선 사용될 계획이다. 앞으로 신철원 중심지로 신철원감성터미널의 새로운 역활을 기대해 본다. 이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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