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을 매며 꽃을 생각하다 [김탁환 칼럼]

한겨레 2024. 4. 30.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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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물을 심은 밭의 풀은 전부 뽑았지만, 비워둔 두 이랑의 풀들은 손을 대지 않았다. 풀씨들이 날아올 테니 당장 없애라는 충고를 내내 듣겠지만, 그 풀들은 그냥 두기로 했다. 경쟁에 방해가 된다고 미리 없앤 풀들은 무엇이고, 그렇게 꼭 없애야만 했는지, 호미를 씻으며 되짚으려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김탁환 | 소설가

이틀 꼬박 텃밭에서 풀을 맸다. 초벌매기를 하지 않으면, 봄볕에 자라는 풀을 따라잡기 힘들다. 호미로 흙을 파고 흩을 뿐만 아니라, 어린 작물 주위는 무릎을 꿇은 채 장갑 낀 열 손가락으로 둥글게 훑어내야 한다. 잠깐만 딴생각을 하면 풀을 둔 채 지나치기 쉽다. 감자밭에는 감자 싹을 닮은 풀들이 올라오고, 대파밭에는 대파를 닮은 풀들이 딱 붙어 길쭉하다.

올해는 작업 속도가 느렸다. 보름쯤 전에 만난 수녀님 말씀이 귓전을 맴돈 탓이다. 아흔두살인 수녀님은 집필실 앞마당을 바라보다가 권하셨다.

“모든 풀들은 꽃이 펴. 풀을 뽑고 싶더라도 참았다가, 꽃 지고 난 후에 해.”

풀이 나오기 시작할 때 호미로 밀고 손으로 거둬야 한다는 걸, 텃밭을 오래 가꿔온 수녀님이 모르실 리 없다. 자연농법을 주창하시는 분도 아니다. 그런데도 풀꽃이 피었다 진 뒤 뽑으라 하시니, 나는 어정쩡하게 웃기만 하고 답을 못 드렸다.

산과 강의 풀이야 건드리고 말고 할 것이 없지만, 논밭과 정원의 풀들은 최대한 빨리 뽑아 없애왔다. 이 농법을 어기고, 농작물과 나무들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듯이, 풀들도 그렇게 한 생애를 살게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섬진강에서 네 해를 보내는 동안, 지켜지지 않는 질서 앞에서 종종 당황스러웠다. 봄이면 꽃나무들 앞에서 자주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전엔 초봄 매화를 시작으로, 산수유, 벚꽃, 철쭉 순으로 꽃들이 피어났다. 봄이라고 다 같은 봄이 아닌 것이다.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지만, 나무들은 그 차이를 알고 시일을 나눠 꽃망울을 맺었다. 그런데 지금은 기후가 변화하면서 수천년 반복되던 순서를 깨고 꽃들이 뒤섞였다. 더 심각한 문제는 꽃이 만발해도 꿀벌이 날아오지 않는 것이다. 온종일 앞마당을 살폈지만, 흰 나비 서너 마리에 말벌 네댓 마리가 전부였다. 너무 많이 와서 걱정이던 꿀벌들이 모습을 감춘 것이다.

올봄 꿀벌처럼 줄어든 것이 생태 체험과 습지 교육을 받기 위해 섬진강 들녘을 찾는 교사와 학생들이다. 논 습지와 강 습지를 함께 갖춘 이 지역은 생물종 다양성이 풍부한 곳으로 일찍부터 주목을 받았다. 강가를 걷고 들녘을 살피고 마을을 돌아보면서, 생태적인 삶을 직접 느끼고 그 중요성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나 각종 예산이 삭감되고 조정되면서, 섬진강을 생태학습의 장으로 여기고 방문하는 이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총선을 치르면서, 과연 국회의원들이 소멸예정 고위험 지역의 난제들을 풀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소멸예정 고위험 지역에 속하는 농촌은 대부분 인근 중소도시와 같은 선거구로 묶였다. 가령 곡성의 경우는 ‘순천광양곡성구례을’에 속한다. 사람 수에 따라 선거구를 획정했으니 합리적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 방식을 따른다면 인구가 급감하는 농촌 출신 후보보다 도시 출신 후보가 국회의원이 될 가능성이 훨씬 높다. 실제 선거운동도 중소도시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소멸예정 고위험 지역에 속한 농촌과 그렇지 않은 도시의 현안들은 다를 수밖에 없다.

꽃이 필 때까지 풀을 뽑지 말라는 수녀님께 세 그루 소나무 아래 묻힌 개들에 대해 말씀드렸다. 이 마당에서 십수년을 뛰놀다가 늙어 죽은 개들이었다. 암탉들 역시 더 이상 알을 낳지 않더라도, 수명이 다할 때까지 돌본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수녀님은 고개 끄덕이며 미소 지으셨다. 사람들이 철석같이 믿고 강조하는 효율성이란 잣대로, 다른 생명을 판단하지 않으려 한다는 마음을 헤아리신 것이다.

봄비가 내릴 때마다 풀이 손가락 한 마디씩 자랐다. 황톳빛이던 밭이 초록빛으로 빠르게 바뀌었다. 마을의 벗들은 아무리 집필에 바빠도 어서 풀을 매라고, 지금을 놓치면 풀들이 어린 농작물들을 덮어 죽일 것이라고 했다.

어둑새벽에 결국 호미를 들고 밭으로 나섰다. 작물을 심은 밭의 풀은 전부 뽑았지만, 비워둔 두 이랑의 풀들은 손을 대지 않았다. 풀씨들이 날아올 테니 당장 없애라는 충고를 내내 듣겠지만, 그 풀들은 그냥 두기로 했다. 풀꽃들이 피면 사진에 담고, ‘마침내 나이 들 자유를 얻은 생크추어리 동물들의 초상’이 담긴 책 ‘사로잡는 얼굴들’과 함께 수녀님께 보내드리고 싶다.

텃밭에 갈 때마다 내 인생의 풀들도 저절로 생각이 날 것이다. 경쟁에 방해가 된다고 미리 없앤 풀들은 무엇이고, 그렇게 꼭 없애야만 했는지, 호미를 씻으며 되짚으려 한다. 틈 하나 없이 단단한 아스팔트 도로를 질주하는 대신, 꽃까지 지킬 풀들의 이름을 되뇌며 텃밭을 느릿느릿 도는 봄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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